밀실에 갇히다

3886 Words
민 대표가 두 사람을 맞으러 자리를 떠났다. 아영도 더는 독불장군처럼 꼿꼿이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엉거주춤 일어섰다. 무릎이 와들거렸다. 숙취에서 덜 깬 머리가 핑 돌았다. “찬혁아! 어서 와라! 이게 얼마 만이야?” “선배도 잘 지냈어요? 여전하시네요.” “나야 늘 그렇지 뭐. 근데 어떻게 둘이 나란히 등장하는 거야. 이제 드디어 공개연애 시작하는 건가? 자 일단 앉자. 앉아서 얘기하지. 아 미안한데, 내 옆으로 자리 좀 옮겨줄래요? 세트로 올 줄 몰랐네요.” 인사를 하는 내내 찬혁의 시선은 테이블 쪽으로 향해 있었다. 뒤에서 세 사람이 왁자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도 여자가 등을 돌리고 있었다. 꼼짝 않고 서 있던 여자가 마침내 쭈뼛쭈뼛 테이블을 돌아 민 대표의 옆에 가서 섰다. 얼굴을 본 순간 속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자자 다들 앉자. 아영씨 자리 옮기게 해서 미안해요. 커플을 찢어놓을 순 없잖아. 내 옆자리가 불편한 건 아니죠.” “불편하긴요. 전 괜찮습니다. 대표님.” “만나서 반가워요. 신아영 씨. 아니, 신아영 작가님. 민 선배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한국을 빛낸 100인의 아티스트 입성을 축하드려요.” 리나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앞에 나란히 앉은 찬혁과 리나를 피해 테이블보 위에 못 박혀있던 아영의 눈이 번쩍 들렸다. 마치, 정말, 오늘 처음 만난 사람처럼 리나가 연기를 펼치고 있다. 거짓을 꾸며내면서도 속눈썹 하나 흔들림 없다. 호의적으로 밀어 올린 입술도,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망울도 너무나 감쪽같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알면서도 그 연기에 보조를 못 맞추고 아영이 당황해버렸다. 맞잡은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아 네. 반갑습니다. 대표님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대표 취임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앞으로 우리 자주 봐요.” “찬혁아, 인사해라. 이쪽은” “여기서 뭐 하냐?” 찬혁의 돌발 반응에 민 대표가 경악했다. “둘이 아는 사이야? 아영씨. 찬혁이 알아요?” “네... 고등학교 때” “고등학교요? 어머. 그럼 아영씨가 그 여자? 찬혁이 너 시골 별장에 잠깐 요양 내려갔을 때 별채에 들어와서 얹혀살았다는?” 아영이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찬혁이 리나를 언짢게 쳐다보았다. 하지도 않은 얘기를 멋대로 지어내고 있었다. 발끈 따지자니 유치해질 것 같았다. 찬혁은 한마디 하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잘근잘근 물리는 아영의 입술만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리나야. 아, 이 녀석 사람 앞에 두고! 미안해요. 아영씨.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저 녀석이 외동으로 오냐 오냐 커서 철딱서니가 없어.” “아니에요. 대표님께서 사과하실 일 아닙니다. 얹혀산 거 맞아요. 오갈 데가 없어서 여기저기 얹혀살았거든요.” “그랬어요? 이거 반전인데? 아영씨 보면서 구김살도 그늘도 전혀 못 느꼈는데? 작가 인터뷰에 소개할 스토리로 딱 인데요. 불우한 어린 시절,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신예 아티스트, 신아영. 별처럼 빛나다. 어때요. 맘에 들어요?” 찬혁의 이마에 주름이 짜증스럽게 지나갔다. 리나의 무례한 발언보다 아영의 저자세가 더 못 볼 꼴이었다. 민 대표의 살가움은 꼴불견 그 자체였다. “아, 별이라니, 너무 과찬이세요. 그리고 불우한 어린 시절도 고난과 역경도 저는 견딜만했습니다. 인생역전도 성공신화도 아이예요. 그러니 그런 인터뷰는 사양하겠습니다.” “역시.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거네요. 힘들었지만 그림이 있어서 견딜만했다. 멋진데요?” “아니요. 견디게 해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찬혁의 시선이 아영에게 날아갔다. 민 대표를 보며 대화를 나누던 아영이 고개를 돌렸다. 찬혁과 눈이 마주쳤다. 아영이 눈을 떨구었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 찬혁의 가슴이 욱신 조였다. 리나가 나섰다. “선배. 작가 사랑이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일을 가장한 애정표현? 설마 그런 건 아니죠? 속 다 보여요. 선배.” “이런. 보였니? 그럼 성공인데. 아영씨 그 사람에 관한 얘기는 사무실 가서 다시 해줘요. 그럼 주문 먼저 할까? 여기!” 민 대표가 손짓으로 매니저를 불렀다. “예. 뭘로 준비해드릴까요?” “우리는 Steak Tartare. 아영씨 괜찮죠? 추천한 거 먹어봐요.” “예. 전 좋습니다.” 저 바보 같은 게. 찬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분명히 거절 못 하고 다 좋아요, 했겠지. 고기를 즐기지 않는, 특히 날고기는 입에도 못 대는 아영이었다. 오늘 점심은 굶을 게 뻔했다. “아영이 생고기 못 먹어요. 넌 다른 거 먹어. Langouste 먹어봐. 여기 대하 맛있더라.” “아니요. 전 대표님 추천대로 하겠습니다. 나 이제 고기 잘 먹어. 나이 드니 식성이 변하네.” “그럴래요? 그럼 우린 그대로.” “예. 알겠습니다. 두 분은 뭘로 준비해드릴까요?” “나는 Pigeonneau en Vessie 주세요. 찬혁이는 Gigot des pres-Sales Roti먹어볼래? 너 양고기 좋아하잖아. 메뉴에 새롭게 추가됐어. 트라이 해볼래?” “Boeuf Rossini로 하죠. 미디엄으로.” “예. 음료는 뭘로 준비해드릴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가볍게 한잔은 괜찮죠, 선배?” “난 다시 사무실 들어가 봐야 하니 아영씨만 한잔해요. 두잔 해도 좋고. 갈 때 모셔다드릴 테니.” “저도 괜찮습니다. 여기 스피리츠면 돼요.” “그럴래요? 우린 됐으니까, 너희 둘이 한 잔씩 해.” “나도 사무실 들어가야 해. 난 커피.” “그래? 그럼 난 Mason de Diable. 레드로.” “예.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매니저가 물러가고 곧 음료가 나왔다. “그래. 찬혁이 너는 요즘 목포 호텔 공사 건으로 골머리 썩는다면서? 벌써 완공됐어야 되는 거 아닌가?” “좀 지연되고 있어요.” “아버지일 중간에 받은 거라 이사진들 알력도 만만치 않겠는걸.”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고. 곧 공사 재개해서 끝내려고요. 한번 내려 가볼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대놓고 둘이 나타난 걸 보니 곧 좋은 소식 기대해도 되는 건가? 리나 너 대표 취임하면 곧 서두를 거라고 하더니. 그런 거야?” “선배는 우리 둘 보기만 하면 왜 그렇게 못 붙여놔서 안달이에요? 누가 누구랑” “찬혁이도 저도 바빠요, 선배. 아직은 한창 일할 때예요.” 리나가 다시 나섰다. 폭우 속을 달려 아영이 탄 택시를 쫓아가던 찬혁을 보았을 때, 리나는 알았다. 아영이 찬혁의 앞에 나타난 이상 이제 찬혁이 죽어도 아영을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둘 사이를 밀어내고 떼어놓아 봐도 결국엔 다시 원점이었다. 그러니 아영을 압박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 발로 물러나도록. 리나는 대화의 중심으로 아영을 몰아갔다. “그러는 선배는요? 요즘 열애설 솔솔 나오던데.” “하하 그래? 소문 빠르네.” “선배 진짜였네? 누구예요? 누구요? 또 신예 작가?” 아영은 리나의 속을 간파했다. 오늘 이 자리가 리나의 철저한 계획하에 만들어졌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찬혁을 데리고 온 것만 봐도 뻔하다. 밀어내고 쫓아버리는 대신 한자리에 모아놓고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겠지. 결국, 알아서 물러나도록. “열심히 공들이고 있는 중. 내 옆에 딱 붙을 때까지. 기대해라.” 민 대표가 말끝에 아영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아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갤러리에서 그가 했던 말이었다. 공들이고 있다던 그 말. 아영은 잠시 숨 쉴 공간이 필요했다. 내내 숨죽이고 있느라 머릿속에 산소가 다 바닥나버렸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실례를 구하기도 전에 의자 먼저 밀어냈다. “아, 죄송하지만, 식사 나오기 전에 저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습니다. 중요한 전화가 있었는데 잊고 있었어요. 식사 나오면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하세요.” “그래요. 얼른 다녀와요. 먼저 식사하고 있을 테니 부담 갖지 말고 통화해요.” “네. 실례하겠습니다...” 테이블을 떠나자 마침내 다리가 말을 들었다. 리나가 따라와 같은 화장실 안에 갇히게 될까 두려웠다. 어디라도 들어가 앉아야 할 것 같았다.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아영은 쏜살같이 레스토랑을 벗어나 안내 표시를 따라 아래층 파우더룸으로 내려갔다. 파우더룸의 문을 열려던 그때, 아영이 안으로 와락 떠밀려 들어갔다. “어머! 뭐예요? 허! 찬혁아!” 뒤따라 온건 리나가 아니라 찬혁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여기 여성 전용공간이야. 사람들 보기 전에 얼른 나가!” “너야말로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찬혁이 성난 걸음으로 아영의 앞에 성큼 다가섰다. “너 저 선배랑 무슨 사이야. 네가 저 선배랑 왜 같이 있냐고!” “일하는 중이야. 전시회 준비 중이었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전시회 준비를 왜 여기 와서 하지?” “그런 것까지 네게 일일이 보고해야 해?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건, 누굴 만나건 그건 내 일이야.” “오늘 이 자리 무슨 자린 줄 알고 따라왔어. 공과 사도 구분 못 하나?” “후배 소개해준다고 했어. 갤러리 대표라고 만나 보라고 자리 만들어주신 거야. 너야말로 이 자리에 낄 사람이 아니거든?” “아까 선배 말 못 들었어? 말귀 못 알아먹어? 이해가 안 되지?” “무슨 소리야?” “말귀 못 알아먹는 거 맞네. 공들인다잖아. 자기 걸로 만들고 있다잖아. 어?” “맞아. 물심양면으로 공들여 주셔. 데뷔전 때부터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셨고, 이만큼 키워주셨어.” “키워? 길들인 거 아니고? 말해봐. 못 빠져나가겠지? 은혜를 저버릴까 봐. 거절 못 하겠지? 생고기도 받아먹을 만큼. 그다음은 뭘 거 같애. 정말 모르는 거야? 알면서 모르는 체하는 거야? 혹시 알고도 붙어있는 거야? 갈데까지 가보게? 그렇게 성공하고 싶어? 인생역전? 그거야? 별처럼 빛나게 해준다니까 헷가닥 돌았어?” “어! 돌았어! 불우한 어린 시절에 집도 절도 없이 떠돌 때 얹혀만 산 게 한이 됐네. 고난도 역경도 혼자 견디는 거 이제 지치고 힘들거든. 공들여 주는 게 뭐가 나빠? 도와준다는데 내가 왜 마다해야 해? 줏대 없이 질질 끌려다니는 줄 아나 본데, 성의에 보답하는 중이거든? 네가 뭔데 내 앞길을 막아? 나는 인생역전 하면 안 돼? 별처럼 빛나면 안 되는 거니?” “그래서. 계속 가겠다고.” “어. 갈 거야. 갈데까지 갈, 아!” “뭐? 다시 말해봐.” “아파! 놔 줘!” 찬혁의 손에 어깨를 붙들려 아영이 벽까지 밀려났다. “나는! 그럼 난 뭐야! 내가 주는 건 왜 싫은 건데 어? 키워 줄게! 공들여준다고! 내 곁에서 인생역전도 하고 별도 되면 되잖아! 난 뭐가 문젠데! 왜 사람 미치게 해!” 쾅! “악!” 찬혁의 주먹이 아영의 얼굴을 스쳐 벽을 후려쳤다. 날아온 주먹에 소스라쳐 고개를 틀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다시 그의 손에 붙들려 창고 안으로 와락 끌려 들어갔다. “뭐 하는 짓이야!” “입 다물어!” 창고 문이 딸깍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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