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래잡기

3669 Words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호텔 앞에 보이는 방송국 취재 차량들도 그렇고, 호텔 로비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도 관광객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영은 프론트로 향하던 발길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렸다. 이 분위기로 봐선, 쟈켓 돌려주겠다고 호텔 사장을 찾는 여자를 사장실로 순순히 올려 보낼 것 같지 않았다. 올라가기는커녕 프론트에서 어슬렁대는 기자의 촉에 딱 걸려 곤혹만 치를게 뻔했다. 아영은 휴대폰을 꺼내 다시 확인했다. 내내 전화도 안 받더니, 택시에서 보낸 문자에도 아직 답이 없다. 확인해놓고 답도 안 하는 인간. 복수하는 건가. 속이 쓰렸다. 그러나 더 쓰려도 싸지 싶었다. 문자 한 통 보내놓고 답 없다고 씩씩대는 꼴이라니. 십 년간 찬혁이 느꼈을 속 터짐이 한꺼번에 가슴에 사무쳤다. 대역죄인이다. 그나저나 때를 잘못 맞춰 온 것 같다. 어쩌지. 아영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없으면 옷만 걸어놓고 후딱 나오면 되지 뭐. 문고리에 걸어놓고 오던가. 일단 가.' 7층. 복도 맨 끝. 사장실. 아영은 직진하기로 했다. 오늘이 아니면 이런 마음 내기까지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민 대표 일도 그렇고. "저기요. 무슨 일로 오셨죠?" "예?" 아영은 노크하려던 자세로 화들짝 뒤로 돌았다. 옆 사무실에서 나온 여직원이 아영을 위아래 훑었다. 사무실 문에 비서실이라고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사장님 좀 뵈러 왔는데요." "약속하시고 오신 건가요?" "아,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요." "죄송합니다. 약속하신 게 아니시면 오늘은 곤란한데요. 돌아가 주시겠어요?" "사장님께 전해드릴 게 있습니다.” “전해드릴 거요?” “예. 자켓 가져왔다고 좀 전해주실래요? 드리고 가야 해서요." "자켓이요?" 여직원의 눈이 다시 아영을 빠르게 훑었다. “어느 브랜드 숍에서 오셨죠? 연락받은 데가 없는데? 처음 뵙는 분 같은데요.” “아, 브랜드 숍 아니고요. 놓고 가신 거라 돌려드리러 왔어요.” 아영이 가슴 앞에 사선으로 맨 화백 끈을 머리 위로 얼른 벗겨내 한쪽 어깨에 멨다. 바꿔 매도 달라 보일 건 없었다. 후줄근했다. "이리 주세요.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여직원이 아영의 팔에 걸쳐진 자켓으로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홱 틀어 피했다. "아니요. 제가 직접 전해드려야 하거든요. 중요한 거라서요. 사장님께 보고 해주실래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신아영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네. 감사합니다." 여직원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뒷모습에 짜증이 한가득이다. 뭔데? 누군데? 무언의 시선들이 복도에 선 아영에게로 날아왔다. 몰라. 여직원의 대꾸는 노골적인 무시를 깔고 있었다. "사장님. 신아영이라는 분이 사장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자켓을 드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 가시라고 했는데, 중요한 거라고 꼭 전해드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여직원이 다시 나왔다. "들어가 보세요." "예. 감사합니다." 똑똑똑 아영은 노크를 했다. 반응이 없었다. 문을 살그머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집무실 안쪽에 웅장한 책상이 보이고, 그 옆은 전면이 통유리 창이었다. 야경이 장관이었다. 찬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문 앞에 서서 망설이다가, 아영은 책상 옆에 서 있는 행어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 위스키병이 누워있었다. 술을 마신 모양이다. 아래층 분위기가 다시 떠올랐다. 걱정스러웠다. 아영은 화백을 책상 옆에 내려놓고, 자켓에서 비닐을 벗겨냈다. 세탁소 쇠 옷걸이를 빼고 행어에 걸려있는 나무 옷걸이에 자켓을 입혀 다시 행어에 걸었다. 그리고 가볍게 탁탁 털어내 납작 눌려있던 옷을 보기 좋게 부풀렸다. "뭐해!" "허!" 아영이 소스라치게 놀라 홱 돌아보았다. 찬혁이 서재처럼 보이는 방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찌른 자세가 반기는 포즈는 아니다. 목소리만큼이나 냉기가 훅 끼쳤다. 성가신 꼴을 마주한 얼굴이다. "뭐 하냐고." "어? 어. 자켓 세탁해놓으라고 해서. 드라이가 됐길래 가져왔어. 오늘 밤에 찾으러 온다는 메시지 확인했거든. 점심도 못 먹고 가버려서 걱정도 됐고. 할 얘기도 있고 해서..." 찬혁이 대꾸 없이 아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심경이 더 복잡해 보였다. 아영은 조마조마해졌다. "신아영. 너 정체가 뭐냐." "뭐?" "청개구리 새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다. 여기 온 진짜 이유가 뭐야." "말했잖아. 자켓 돌려주러 왔다고." "옷이 그거 하날까 봐? 내가 설마 내일 입을 옷이 없어서 그거 찾겠다고 간다고 했을까 봐? 정말 궁금해서 말인데, 정말 옷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랬다고 하면 이때까지 네가 한 짓 다 용서해줄게.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거니까 다 눈감아 주겠다고. 그래?" 아영은 아차 싶었다. 찬혁의 말이 맞다. 자켓으로 남성복 매장을 차려도 될 정도겠지. 버려도 버린 게 티도 안 났을 텐데, 그걸 끌어안고 왔다. 구질구질해진 것 같아 자존심이 확 상했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 와중에 용서? 기가 찼다. "내가 한 짓?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너지, 박찬혁." "다시 시작이냐? 다 내 탓이다, 이거지 지금. 미안하단 말도 못 알아들어? 그것도 풀어서 해석해줘야 해? 그만큼 미안하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으면 알아 처먹어야지! 뭘 얼마나 더해!" 찬혁의 얼굴이 벌게졌다. 성큼성큼 다가왔다. 술기운 탓인지 걸음이 흐트러졌다. 맨정신일 때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한 대 칠 기세다. 그러나 아영은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를 꼿꼿이 지켰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비굴한 꼴까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치라지! 시원하게 한 대 맞고 시작하게! 그래야 덜 미안... "흡! 으읍!!" 칠 것처럼 뻗치고 온 손으로 아영의 머리를 휘어잡았다. 우악스럽게 거머쥐고 입을 맞췄다.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찬양손에 붙들린 머리가 무력하게 목 위에서 대롱거렸다. 자세를 낮춰주는 배려 따윈 없었다. 까치발까지 아슬아슬 세워가며 그의 팔에 매달려야 했다. 안 그러면 목이 빠질 것 같았다. 버둥댈수록 사납고 집요해졌다. "으흡! 읍 놔! 아흡!" 쿵! "아악!" 아영이 통유리창에 부딪혀 튕겨 나가 카펫 위에 넘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뿌리치다 부딪힌 후 폭풍이 엄습했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일어설 수가 없었다.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이거 때문에 왔잖아. 네가 나한테 원하는 게 이거잖아. 아냐?" 찬혁이 버럭 소리쳤다. 엉거주춤 일어서다 말고 아영이 주춤 멈췄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일어섰다. 너무도 차분해서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상황에 걸맞지 않은 이성적인 반응이었다. 깨달음의 몸짓이었다. "청개구리가 뭔가 했다. 그런데 그래 보였겠네. 청개구리 맞네." 시작도 안 했는데, 이제 막 시작할 건데 짜증 나게 눈물이 먼저 터졌다. 아영은 손끝으로 눈물을 신경질적으로 쓱쓱 밀어냈다. "싫다고 도망칠 땐 언제고 키스하는 족족 좋아했네, 내가. 근데 어쩌지? 그것 때문에 올 만큼 끝내주지 않은데? 나 이 정도에 뻑 가는 그런 순진한 여자 아냐." "그만해!"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너라고 했던 건 바로 이런 거였어. 사람 함부로 휘돌리는 거. 네 멋대로 판단해서 입 들이미는 거. 그래서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거. 과거 얘기를 또 끄집어낸 게 아니라고." "이제 와서 과거는 과거로 치겠다. 말은 그렇게 하는 놈이 그럼 나는 왜 그렇게 싫은데! 미친놈처럼 매달려도 싫다면서! 죽어라 거부하더니 이젠 딴 놈한테 가겠다며! 그래 놓고 그 자켓을 들고 와? 내가 그걸 네 집에 왜 두고 왔겠어! 어? 자꾸 도망치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너 한 번 더 보겠다는 거 아냐! 그걸 정말 몰랐다고? 그렇게까지 구차하게 매달려도 기를 쓰고 밀어낼 땐 언제고 그걸 손수 전하겠다고 밖에서 우겨? 점심도 못 먹고 가서 뭐가 어쩌고 어째? 대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왜 사람 헷갈리게 하냐고!" "너. 내가 원하는 거 너. 그 말 하러 왔어. 됐어? 이제 맘에 들어? 대답으로 충분하니? 아직도 헷갈려? 이런 식으로 싸우려고 온 거 아닌데 본의 아니게 또 이렇게 됐네. 이런 얘기 하겠다고 온 거 아니었어. 근데 여기 못 있겠다. 열 받아서 더는 너 못 보겠어. 갈게." 아영은 매몰차게 돌아섰다. 진실을 털어놓는 건 고사하고 말 한마디도 더는 섞고 싶지 않았다. 비밀이라고 꼭꼭 숨기다 보니 결국엔 이 지경까지 와버렸다. 다 털어놓으면 이 꼬임도 자연스럽게 풀리겠지.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더 악화시킬 것 같았다. 찬혁의 손아귀에서 탱탱볼처럼 마구 주물리고 튕겨 나간 모욕감에 치가 떨려 감정이 통제 불능 상태였다.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다. 찬혁이 잠시 주춤했다. 멍해졌다. 너? 너라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서 10년을 찾아 헤매게 해놓고 너? 안 된다고 찰 땐 언제고 너? 갑자기 태도를 바꾼 아영을 달려가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려줘야 하는데 찬혁은 허탈해졌다. 밑도 끝도 없이 너? 가타부타 이유도 없이? 그래 놓고 아영이 또 가버리려 한다. 장난하나. 한달음에 달려가 아영의 손목을 낚아채 서재로 끌고 갔다. "아! 뭐야 너? 왜 또 이래? 놔 줘!" "원한다며. 근데 왜 가. 가져야지, 왜 도망가. 말이랑 행동이 다르잖아!" 찬혁은 뿌리치려 반항하는 아영을 서재로 끌고 들어가 집어 던져버렸다. 아영이 이번엔 소파 위에 나동그라졌다. 서재 문이 쿵 닫혔다. "원한다며. 가지라고." 찬혁이 셔츠 소매 단추를 거칠게 풀며 다가왔다. "미쳤어? 너야말로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여기 있기 싫다고! 더 보여줄 추접스러운 짓이 남았니?" "이제 너 놔주려고 했거든. 죽어도 나는 아니라니까 내가 물러나 주려고 했거든. 근데 나라며. 원하는 게 나라며! 그러니까 증명하라고!" 아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몸을 사리고 설설 기어 도망가는 꼴을 보여주긴 싫었다. 그런 굴욕까지 보일 순 없었다. 셔츠 단추까지 풀어헤친 그를 보란 듯이 밀치고 당당하게 지나가려는 순간, 붕 날았다. 찬혁을 안고 소파 위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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