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서 돈을 딴 것도 자신이고 강령을 넘기라고 한 것도 자신인데 불편한 저를 대신해 만만한 최두식전무에게 괜한 시비를 거는 전 사장이 기분이 나쁘든 말든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강령이 몇년 째 매출 하위권인 거 조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다 강령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어 아무에게나 넘길 수도 없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거 알고 있으니 저한테 넘긴다고 아깝지 않을 텐데요”
“아무리 매출이 적더라도 블랙 뿌리인데 아무한테나 넘길 수는 없지”
"아무나 아니고 차우빈한테 넘겼으니 조직에서 뭐라고 할 사람 없을 겁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예정대로라면 눈 앞에 있는 저 어린 놈에게 자신이 공들인 블랙을 넘겨야 했다.
“블랙 사업장 중에서 강령이 일하기 가장 힘든 곳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 월급쟁이 사장보다 차기 수장이 강령을 맡는다고 하면 일하고 싶어 하는 조직원들도 생기지 않겠어요"
날을 제대로 갈았는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전필용 속을 긁어대는 말들이었기에 최두식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우빈을 지켜보았고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전필용은 씩씩대면서 다른 말은 못하고 술만 마셨다.
“십년 전 회장님한테 받은 십억을 법정최저 이자율로 계산하더라도 강령매출 몇년은 모아야 청산할 수 있는 금액이니 비밀로 한다는 조건으로 강령 넘겨 받으면 나는 손해지만 전 사장은 손해보다는 이득이 더 많은 거래인데 어떻게 생각해요!”
생각이 많아 돌려 말하는 차희태와는 달리 사용하는 단어부터 행동까지 거침없고 저돌적인 차우빈은 어중간한 변명이나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번에 깨달은 전필용은 술을 마시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도련님이 술을 마시다 손을 들어 올리자 출입문에 인형처럼 붙어 있던 충재가 테이블로 다가와 전필용 앞에 서류 한 장을 내려 놓았다.
충재가 테이블에 서류를 내려 놓자 우빈은 전필용에게 서류를 확인해 보라고 말하고는 술잔을 들었다.
“읽어보세요. 방금 얘기한대로 강령에 있는 사업장 전부를 저에게 넘긴다는 계약서 입니다”
일진이 사나운 것인지 새파랗게 어린 놈에게 돈을 잃은데다 강령까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두 넘겨주게 생긴 지금의 상황이 전필용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두식 말처럼 오늘 자리는 자신이 두 사람을 초대했기에 만들어진 자리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가 차우빈이라는 놈한테 말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끔찍이도 아끼는 어머니 밑에서 원하는대로 돈 쓰면서 밤새 술마시고 여자랑 뒹구는 놈인 줄로만 알았던 차우빈에게 완벽하게 말렸다는 생각에 전필용은 지금까지 먹었던 술이 전부 깨는 듯 하며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계약서에 사인하면 과거는 비밀로 묻어 둘 테니 도장 찍으세요”
“비밀을 끝까지 함구하겠다는 말이 사실인가?”
“회장님 허락도 받지 않고 계약서에 도장 찍었다고 하면 화는 내시겠지만 그 이상 제제를 가하지는 않으실 거라는 거 잘 알잖아요. 하지만 여기서 그냥 나간다고 하면 제가 누굴 찾아갈지도 잘 아실 거에요"
차우빈 말대로 허락 없이 강령을 주고 받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넘겼으니 잔소리 하는 것으로 끝낼 사람이 차희태회장이었다. 하지만 제가 당신 아들을 납치한 진범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관용이나 용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제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선택지는 하나 밖에 없었다.
블랙수장이 되기 전 서울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자신을 수장자리에 앉힌 차희태는 서울을 전필용이 가장 믿는 직원에게 맡기도록 하고는 그를 강령으로 불러내려 제 옆에서 조직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가 수장이 될 때만해도 조직에서 입지가 탄탄하지는 않았던 전필용을 옆에 두면서 힘을 실어주면서 동시에 그를 감시 하고 있었고 전필용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감시자들에게 사소한 오해라도 주게 될까 조심스럽게 행동했던 전필용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고 자신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조직에서 저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블랙아미를 사조직화 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였고 그런 날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강령을 차우빈에게 넘기고 서울로 가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차희태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차우빈 말대로 자신에게 절대 나쁘지 않은 거래이니 이 기회를 잡을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조금 더 시간을 벌 것인지를 두고 전필용은 고민에 빠졌다.
전필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차우빈은 그가 빨리 도장을 찍도록 한마디를 던졌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 우리 거래는 성사가 되는 것이고 제가 구두로 약속한 내용은 최두식전무님이 증인이 되어 지켜 줄 겁니다"
끝까지 비밀을 지키겠다는 말에 대해 최두식전무를 증인으로 세운 차우빈 말에 전필용은 더는 시간을 끌지 않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지장까지 찍었다. 이미 결과가 나온 판에서 시간을 끄는 것은 무의미한 행동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더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전필용이었다.
친필사인에 지장까지 찍힌 계약서를 챙긴 충재는 도련님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에게 내실 테이블을 다시 세팅하라 이르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브이아이피 룸 담당 매니저는 경호원 지시에 대기하고 있는 직원들을 불러 휴게실 안으로 들일 음식과 술을 가져오라고 이른 후 직원들이 도착하자 룸 문을 열고 들어가 테이블을 새롭게 세팅 한 후 비어 있는 술잔 전부에 술을 따랐다.
계약서를 들고 브이아이피 룸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많은 장소로 나온 충재는 최순길에게 전화를 걸었다. 충재로부터 도련님 사인이 떨어졌다는 전화를 받은 순길은 손님으로 위장해 클럽으로 들어간 직원들에게 '개시'라는 문자를 보낸 후 주변애서 대기중인 직원들에게 문자를 보내 사방을 에워싸고 클럽을 단숨에 장악하라는 약속어인 '원사'를 보냈다.
문자를 보내고 자동차에서 대기중이던 순길은 자신과 같이 있는 직원들을 전부 데리고 클럽 정문으로 향했다.
클럽 정문과 주변에서 손님들을 관리하고 있던 가드들이 다가와 순길 일행을 막아 섰지만 특공무술로 단련된 그를 막아서지 못했고 단번에 제압을 당했다.
순길은 자신의 뒤를 따라온 직원들에게 클럽안으로 성원재 직원 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고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순길이 외부에서 블랙조직원들을 정리하는 사이 클럽 내부는 손님으로 가장해 이미 들어가 있던 김주찬과 송도가직원들과 함께 가드들을 이미 제압해 룸 안으로 밀어 넣어 불미스런 일로 영업이 끝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김주찬은 클럽가드와 직원들 핸드폰을 전부 수거해 외부와 연락하지 못하도록 직원들을 완전히 고립시킨 후 영업을 이어갔고, 클럽 안으로 들어온 순길은 직원 몇을 데리고 전필용이 사용했던 사무실로 찾아가 내부에 있는 가구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샅샅이 뒤져가며 모든 자료를 모았다.
김주찬과 먼저 내부로 들어왔던 송도는 일이 시작 되기 전 보안실을 먼저 장악해야 했기에 클럽으로 들어오자마자 보안실로 바로 달려가 보안실에 있던 직원들을 제압한 후 비밀창고를 찾아내어 영업용 룸뿐만 아니라 특별한 손님을 받는 패닉룸을 통해 녹화된 영상까지 모두 확보했다.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 성원재와 골드볼 직원들 덕분에 클럽은 예상보다 빠르게 장악되었고 손님들은 클럽에서 일하는 직원들끼리 약간의 다툼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블랙조직원들의 대응은 형편없었다.
카지노 브이아이피 룸에 있는 전필용은 강령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최두식전무가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며 돈을 잃은 쓰라린 마음을 달랬다. 우빈에게 강령을 넘긴 것은 그에게는 혹 하나를 떼어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그건 이미 머리 속에서 사라졌다.
회사건 조직이건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던 청개구리가 자신에게 통쾌하게 복수를 했으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묘한 얼굴로 술을 마시고 있는 우빈을 보면서 전필용 머리는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빈과 최두식이 자신이 했던 일을 끝까지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믿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그이기에 전필용은 내일 아침 일찍 회장님을 찾아가 강령을 아드님에게 넘겼으니 자신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말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
초희와 여진이 식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차 회장이 변종현실장과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룹이나 성원재 행사가 있을 때면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니 몇 개월에 한번씩은 얼굴을 보며 살았지만 한 집에서 보기에는 아주 오랜만이기에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중요한 손님이 오셨다는 데 아가씨인가 봅니다”
변종현실장은 나여진 이사장님과 나란히 앉아 있는 어린 아가씨를 보고는 이사장님에게 물었다.
“네, 앞으로 성원재에서 같이 살 아이입니다”
“안녕하세요, 은초희라고 합니다”
티브이와 신문에서 보던 차희태회장을 식사자리에서 만나게 된 초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님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저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우빈이 손님으로 왔다고 하던데 잠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산다는 말이에요?"
"네, 우빈이가 그렇다고 말했어요"
"은초희라고 했던가, 우리 우빈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초희가 보기에도 그렇지만 나이가 많이 어립니다. 그러니 궁금한 게 있으시면 우빈이한테 나중에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이가 많이 어리다는 말에 차희태는 초희를 잠시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는 질문을 하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내려 찻잔을 들었다. 저의 등장이 갑작스럽게 느껴질 회장님에게 초희는 제가 알고 있는 내용정도는 얘기해야 한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제가 어려서 많은 내용을 알지는 못하지만 차우빈씨가 저희 집을 도와주셨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이 어리다고 하는데 올해 어떻게 되나요?”
“이제 열일곱 되었습니다”
이제 열일곱이라는 말에 차희태는 이사장 옆에 앉아 있는 손님 얼굴을 다시한번 유심히 바라보며 또 다른 질문을 했다.
“학생 집이 서울인가?”
“아니요, 강령입니다”
“우빈이는 강령이 아니라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학생 집안을 어떻게 알고 도와 주었을고!”
자신도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자신보다 회장님이 우빈과 초희가 어떤 관계인지 더 궁금할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여진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손님을 집으로 들인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했고 때맞춰 김 여사가 음식들을 식당으로 들여오자 대화는 중단되었다.
“식사 나왔으니까 얘기는 나중에 하고 식사하시죠”
이사장 말에 차희태는 군말 없이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고 여진은 옆자리에 있는 초희에게 식사를 하라고 말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여진은 초희와 간간히 좋아하는 음식과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차 회장은 이사장과 꼬마 손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따금씩 둘을 한번씩 쳐다보며 조용히 식사했다.
식사가 끝나고 초희는 이층으로 올라가 책상 앞에 앉았으나 시선은 책이 아니라 창문 밖으로 보이는 푸른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는 넓은 마당에 가 있었다.
저에게 이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던 차우빈이라는 사람은 리조트에서 잠깐 만난 후로는 우연히 마주친 적도 없었기에 그의 근황이 궁금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 볼 수 없었다.
자신이 성원재에 들어오더라도 가족들이 살고 있는 건물에서 넓은 방을 받고 귀한 대접을 받으며 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제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물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잡생각과 무념무상의 모습으로 창 밖을 보고 있던 초희는 책상 위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진동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여보세요”
_”누나!”
“찬이구나. 저녁은 먹었어?”
_“응, 엄마아빠랑 같이 먹었어. 누나는?”
“누나도 먹었어. 찬이야 아빠 좀 바꿔줄래?”
_”작은 딸! 별일 없는 거지?”
“잘 지내고 있어요. 아빠 혹시 그 사람 또 만났어요?”
_”그 사람 누구? 돈 빌려준 사람?”
“네”
_”아니, 내일쯤 연락하겠다는 문자만 왔어”
“네.. 짐은 다 쌌어?”
_”당장 필요한 것들 위주로 챙겼어. 나중에 택배로 받아도 되니까”
“나는 아빠 가는 거 못 보겠다. 미안해”
_"네가 뭘 미안해. 아빠 때문에 네가 가족이랑 떨어져 살게 됐으니 아빠가 미안하지”
“내 걱정은 안 해도 될 만큼 좋은 집에서 지내니까 아빠도 가서 일만 열심해”
_"알았어, 아빠가 열심히 일해서 빨리 갚을게”
“금방 갚을 수 있는 금액 아닌 거 알아. 그러니까 빨리 갚겠다고 무리하지 말고 나도 아르바이트 해서 도와 줄게”
_"그 사람한테 들었구나..
지금까지는 엄마 혼자 돈 버느라 네가 아르바이트 해도 할말이 없었지만 이제 아빠가 돈 버니까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해”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직하면 아르바이트 하는 것보다 많이 벌 수 있으니까 도움이 될 거야”
_”초희야! 아빠가 만든 문제는 아빠가 정리할 테니까 네가 하고 싶은 일 포기하지마.
네가 그러면 아빠는 너한테 평생 미안할거야”
얼마나 큰 문제에 얽혔는지 노름에 정신 팔린 후로는 이성적으로 대화하기가 어려웠던 아빠가 예전으로 돌아온 듯 한 말에 초희 얼굴에 미소가 올랐다.
“내가 알던 우리 아빠가 돌아온 것 같네”
_”가족들한테 많이 미안한데, 특히나 둘째 딸한테 가장 미안해”
“돈으로 힘들게는 했어도 술 먹고 행패는 안 부렸으니까 용서해줄게”
_"하하하, 아빠가 그렇게까지 바닥인 사람은 아니었잖아”
“아빠가 가족을 힘들게 할 거라고 예상 못했는데, 사람 일은 모른다는 말이 생각이 나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