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대표의 부탁은 재고의 여지도 없었다. 자선 파티에 일일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정도야 그렇다 쳐도 다른 데도 아니고 한빛갤러리에? 듣자마자 아영의 대답은 정해졌다. 사양하겠습니다 였다.
그러나 대뜸 그럴 순 없었다. 어렵게 꺼내는 부탁이라고 했다. 민 대표는 전에 없이 한참을 뜸까지 들였다. 장황하게 돌아 본론으로 넘어갔다. 쉽지 않은 부탁이었음은 분명했다.
그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던 부분은 파트너였다. 아영의 거부 이유는 리나의 갤러리였다. 단도직입적인 거절은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대답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이미 정해진 답이라 해도 생각해볼 겨를 정도의 시간 차는 두고 마다하는 게 맞지 싶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 버렸다. 대답 시기를 고민해볼 짬조차 없었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일어났다. 들불처럼 번졌다.
띠리링 띠리링~
"네! 대표님. 안녕하세요!"
"아영 씨 바빠요? 전화 통화 힘드네?"
"아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일이 좀 많았어요."
"목소리가 지금도 급한 것 같은데? 통화 가능해요?"
"아 저기... 지금은 좀 곤란한데요. 급한 일로 통화 중이었어요. 죄송합니다. 전화 드릴게요."
"음.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니죠? 답하기 곤란한 부탁이었다면 솔직하게 그렇다고 말해주면 돼요. 너무 고민하지 말아요."
"아니에요. 고민 없습니다. 저녁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고민 아니라니,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럼 일 봐요."
"네. 죄송합니다. 들어가세요."
통화를 끊자마자 아영은 대기 중이던 라인을 재빨리 연결했다.
"그러니까 왜 못 오신다는 말씀이세요? 통보 메시지 하나 띡 보내놓고 연락도 계속 피하시고 갑자기 이러시면 어떡해요? 누드 크로키 회원들 접수까지 다 끝난 상황인데요?"
"아 그거야 그쪽 원장님 사정이고, 난 안 가니까 그렇게 아십시오."
호칭이 관장에서 원장으로 격하되었다. 동네 갤러리라고 무슨 구멍가겐 줄 아는 거야? 날숨이 푸우! 과격하게 터졌다. 이마에서 잔머리가 훅 날아갔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하시면 안 되죠. 우리 갤러리 마지막 행사라고 변동 있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 드렸잖아요. 바로 다음 주 금요일부터 시작입니다. 3개월짜리 행사를 일주일 남겨놓고 못 하겠다고 하시면 전 어찌하라고요? 사정해도 안 될 판에 이렇게 통보만 주는 법이 어디 있죠?"
"원장님 법 좋아하시나 봐. 그럼 남자친구 단속부터 좀 잘하셔야겠습니다."
"남자친구 단속이라니요? 이 상황에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뜬금없으세요? 그건 내가 할 소린데? 파라오에서 시원~ 하게 사인해주고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얻어터졌다고요. 내가. 아주 골고루 타작하고 가셨다니까!"
"예? 누가요? 왜요?"
"아 이렇게 모른 척하실 거예요. 진짜? 갑자기 들이닥쳐서 신아영이랑 1차 뛴 새끼 나오라고 개판을 만들고 갔다니까! 신아영. 원장님 아니에요? 아~ 나 참 별."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세상에 딱 한 사람뿐이었다. 박찬혁.
"아... 죄송합니다.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한 달 이상 꼼짝도 못 하는 상황이거든요. 내가. 갤러리 문 닫기 전에 마지막 행사라고 하도 매달리길래 돕는 셈 치고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해드리려고 했는데. 책임은 남자 친구한테 물으시라고요."
"저기... 그럼 대타라도 소개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인수인계라도 해주고 가시면..."
"인수인계요? 2번 매 타자를? 룸살롱에서 그 꼴을 다 봤는데 누가 하겠다고? 할 사람 있어도 소개를 어떻게 합니까? 난 빠지니까 그런 줄 아세요. 끊습니다!"
"예..."
이미 끊긴 통화에 공손히 답을 달았다. 얼마를 요구할지 후폭풍이 두려웠다. 그러나 시원하게 패고 줄만큼도 줬나 보다. 소송도 치료비 소리도 없이 순순히 물러갔다. 그런데도 휴대폰을 든 손이 맥없이 툭 떨어졌다. 마지막 행사 회원비는 삼 개월 치였다. 그 돈은 이미 대출금 상환에 부어버렸다. 아영은 책상 위에 엎어졌다. 쿵. 쿵. 쿵. 이마를 찧었다. 어떡하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띠리링 띠리링~
찬혁일 것이다. 열이 뻗쳤다. 아영은 꼼짝 않고 버텼다.
띠리링 띠리링~
생각할수록 분했다. 팩 일어나 휴대폰을 들었다. 관리실이었다. 월세 인상 공지문이 떠올랐다. 큰일이다. 아영은 급 소심해졌다.
"여보세요..."
"네~ 관장님. 여기 관리실인데요. 다름이 아니라 여기 건물이 팔렸어요."
"예? 언제요? 말씀도 없으셨잖아요!"
"아이 뭐 세입자들한테 일일이 허락받고 팔 일도 아니고, 파는 거야 건물주 맘이지 안 그래요?"
"그거야 그렇긴 한데... 그래서 당장 월세 올려 달라고 해요? 지금은 좀 어려운데..."
"그게 아니고. 갤러리를 빼달라고 하네요? 거기 딴 거 들어올 게 있다는데?"
"예? 갑자기요?"
"갑자기는 갑자긴데, 재계약일이 6개월이나 남았으니 그동안 나갈 준비 하는 데는 문제 없잖아요."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면 안 돼죠... "
"그래도 관장님 다행인 줄 아셔야 해. 보증금 돌려주고도 6개월씩이나 기다려주는 주인이 어딨겠어. 안 그래요?"
"잠깐만요. 보증금을 누가 누구한테 돌려줘요?"
"같이 일했던 갤러리 관장 그 누구야 백경이라고 했었나? 알잖아요. 얘기 안 해요?"
"지금은 저 혼자인 거 아시잖아요! 저하고 얘기하는 게 먼저 아니에요? 그게 순서죠!"
"난들 아나. 건물주가 알아서 한걸. 나야 중간에서 전달하는 입장인걸 뭐. 직접 얘기를 해보던가."
"건물주가 누구죠? 제가 직접 통화할게요."
"가만... 어 한빛갤러리 채 리나 대표라고 돼 있네요? 전화번호 문자로 찍어 드릴게."
"하아!"
"아이고 보아하니 백 관장한테 아무 얘기 못들은 모양이네? 이미 다 끝난 거, 괜히 건물주한테 연락해서 싫은 소리 할 거 뭐 있어 안 그래요? 백경아 씨한테 연락하면 되지. 아무튼, 난 얘기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갤러리 빼줘요. 6개월 채울 거 뭐 있어. 월세만 나가지. 안 그래요? 그럼 끊을게요."
안 그랬다.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회원비 천이백 만원이 빚으로 남았다. 보증금 오천만 원이 날아갔다. 산꼭대기 반지하를 탈출할 돈이었다.
띠링
찬혁의 메시지였다.
[전화 받아!]
문자가 악에 받쳐있었다. 이미 메세지창은 찬혁의 문자 테러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불행은 시간 차를 두는 따위의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넋 놓고 주저앉아 있을 겨를이 없었다. 누드 크로키 행사는 물 건너갔다. 그렇다고 이미 다 써버린 회원비를 만회하겠다고 갤러리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관리인 말이 맞았다. 월세의 압박을 무시할 수가 없다. 개인 교습 자리를 부탁하느라 오후 내내 전화통에 매달려야 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한국을 빛낸 100인의 아트스트 타이틀은 여러모로 유용했다.
밤이 늦어서야 갤러리를 나섰다. 전철 안은 한산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또 부질없이 빌어본다. 이거 타고 끝없이 끝까지 가버렸으면. 그러나 순환선은 같은 궤도를 맴돌았다. 제가 탄 운명의 열차 같다. 늘 불행의 시작점에 데려다 놓았다. 아영은 버티기를 포기하고 내렸다.
언덕을 터덜터덜 올라가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보증금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 제 몫을 챙겨 간 사람이 뻔뻔하게 보증금을 가로채? 백경아가 한 짓이 기가 막혀 분하고 억울했다.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영을 기가 막히게 만든 건 리나였다. 연락도 끊고 잠적해버린 백경아를 리나는 어떻게 찾은 걸까. 아영은 휴대폰을 꺼냈다. 관리인이 찍어 준 리나의 번호 위에서 손가락이 오락가락 망설였다. 시간이 너무 늦긴 했다. 벌써 퇴근했겠지. 그래도 일단 해봐? 망설이는 찰나의 시간이 영원 같았다. 아영은 번호를 눌렀다. 꾹
"네 한빛갤러리입니다."
허! 전화를 받았다. 순간 아영은 바짝 긴장해버렸다. 손끝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키지 않아도 물어볼 건 물어봐야 하니까.
"아... 여보세요."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채 리나 대표님과 통화를 좀 하고 싶은데요."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신아영입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지금 통화 중이신데, 다시 연락 주시겠어요?"
"아니요. 기다리겠습니다. 좀 급해서요."
"네 알겠습니다."
대기 시간은 길었다. 기분 탓일까. 전화기를 옆에 놓고 회전의자에 앉아 빙글거리는 리나가 그려졌다. 아영은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네~ 채리나 입니다."
"나야."
"누구?"
전해 듣고도 발뺌이다. 프렌치 레스토랑 때부터 알아봤다. 모르쇠 연기로는 대상감이었다.
"나야. 신아영. 바쁜 사람 방해한 것 같으니 용건만 간단히 말할게."
"그러게. 내가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다. 다음 주 우리 1주년 자선 인의 밤 파티 있잖아. 너도 온다며? 민 선배한테 얘기 들었지?"
"지금 그 얘기 하려고 이 시간에 전화한 거 아니야. 건물주 된 거 축하한다."
"풉. 그거였어? 난 또 뭐라고."
웃어? 하아! 죽어가는 사람 앞에 놓고 할 짓이니? 그러나 리나였다. 죽은 사람 앞에서도 웃을 사람이 아닐까.
"혹시 보증금 때문이니? 백경아 씨랑 거래 끝냈는데. 이제 남은 건 둘이 알아서 하지? 돈 몇 푼 갖고 구질구질하게 전화하지 말고?"
"하아! 구질구질해 보였다니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네. 일에는 절차와 순서라는 게 있는 거지. 대표 자리에 있으니 잘 알거 아냐. 현재 갤러리 관장은 나야. 나를 먼저 봤어야 하는 거 아니니?"
"절차를 따지고 싶은가 본데. 난 서류상 절차만 따지거든. 그래야 실수가 없으니까. 관장 백경아. 실장 신아영. 절차로 봐도 순서로 봐도 내가 널 만나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관장이 하고 싶으면 서류 먼저 정리했어야지. 그걸 왜 나한테 따지는 거야? 야밤에 득달같이 전화해서?"
눈물이 왈칵 고였다. 모멸감보다 더한 자괴감에 치가 떨렸다. 리나 말이 옳았다. 그게 순서고 절차였다. 그러나 종적을 감춘 백경아와 서류를 정리할 방법은 없었다. 아영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내 말이 틀려? 뭐 더 가르쳐 줘? 아무리 동네 미술학원이어도 갤러리 간판 내걸려면 기본은 알아야지. 궁금한 거 있을 땐 언제든지 연락해라. 법무팀이랑 연결해줄게. 앞으로 우리 갤러리에 모시려면 그 정도는 도와줘야지. 상부상조하자는 의미에서."
"고맙지만 사양할게. 법무팀 동원할 만큼 대단한 미술학원이 아니라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자."
"얼마든지. 뭔데?"
"백경아 연락처 알려줘."
"신아영. 너 너무 무례한 것 같단 생각 안 드니? 내가 전화번호부도 아니고, 설령 안다고 해도 네가 알려줘, 하면 내가 네 하고 알려줘야 해? 돈이 매우 급한 건 알겠는데, 정신은 차리자 아영아. 그런 건 관리인한테 물어."
"그 번호 없는 번호였어."
"너도 참 딱하다. 그 문제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네. 돈 필요하거든 와. 상부상조를 그걸로 하면 되겠네."
"... 그만 끊을게."
"아. 나도 한마디만 하자. 월간 아트 나왔더라. 감명 깊게 잘 읽었어. 찬혁이 얘기 인터뷰에서 빼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부탁해. 처신 잘하고. 밤이 너무 늦었네. 그 동네 살벌해 보이던데. 밤길 조심해라. 그만 끊자."
처신 잘 하고? 찬혁이 앞에서? 밤길에서? 맥락 없는 두 내용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 있는 ‘처신 잘해라’ 소리가 하도 기가 막혀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아영은 얼굴을 싹싹 닦아냈다.
뚜벅
가방에 넣다 말고 아영은 휴대폰을 다시 꺼내 손에 꼭 쥐었다.
뚜벅 뚜벅
뒤를 홱 돌아보았다. 모퉁이 뒤로 그림자가 휙 숨었다. 소름이 쫙 끼쳤다. 서둘렀다.
뚜벅 뚜벅 뚜벅
그림자가 보폭을 맞춰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