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달리기

3826
'지나가는 사람일수도 있잖아! 괜히 엄한 사람 치한으로 몰지 말고 진정해!' 그러나 진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 지나는 모퉁이부터는 거의 빈집들이다. 재개발 발표가 난 후 2년 동안 하나 둘 이곳을 떠났다. 소리 지른다고 나와봐 줄 사람도 없다. 지나가서 언덕을 넘으면 공터였다. 그 뒤는 산이다! '야간 산행 온 거야? 그런 거야?' 그 생각이 더 무서웠다. 삽이라도 들고 있을 것만 같았다. 파묻을 계산까지 한 사람이 구두를 신고 왔다고? 뚜벅 뚜벅 뚜벅 뚜벅 추리하는 사이 그림자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비탈에 기우뚱 서 있는 가로등 불빛에 쭈욱 늘어난 뒷사람 그림자가 아영의 다리 사이에 길게 누웠다. 허억! 소스라치게 놀라 파다닥 피했다. 혓바닥 같은 그림자가 바닥을 핥으며 물러갔다. 시커먼 그림자에 눈이라도 달린 것만 같았다. 따라오는 게 확실했다. 따라오는지 본다고 걸음을 늦춰 보는 것도 내빼는 것도 이젠 위험했다. 112 신고는 감감무소식이다. 아영의 머리가 다람쥐 쳇바퀴처럼 미친 듯이 돌았다. '찬혁아! 어떡해 찬혁아!' 제일 먼저 터져 나온 이름이었다. 다른 사람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찬혁이 필요했다. ‘찬혁아!' 쳇바퀴 안에서 찬혁의 이름만 로또 볼처럼 튀어나왔다. 그러나 찬혁은 목포에 있다. 올 수가 없다. '그런 사람한테 뭘 어쩌라고! 성격 몰라서?' 일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날아올 찬혁이었다. 그러나 축지법을 써서 한걸음에 날아온다 한들 상황은 이미 끝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연락은 무의미하다. 아니, 서두르다 찬혁이 사고라도 나서 다치기라도 하면! '안돼!' 연락하면 안 된다! 안 된다면서도 아영은 기어이 휴대폰을 들었다. 청개구리 새끼! 찬혁은 저를 너무나 잘 알았다. 휴대폰을 든 손이 덜덜 떨려 통제가 안 됐다. 남에 손 같았다. 누르기도 전에 벨이 먼저 울렸다. 다행이었다! 띠리링 띠리링~ "허! 여보세요! 대표님!" "아영 씨 왜 그렇게 놀라요? 에이 고민 아니라더니 아직 고민한 거 맞네. 그런 것 같아서 아영 씨 좀 보고 가려고 무작정 집 근처까지 왔는데. 이런.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다음에 봐야겠죠." "아뇨! 끊지 마세요! 저랑 계속 통화 해주세요! 누가 쫓아와요!" 도와줄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왈칵 터져버렸다. 일부러 목청까지 카랑카랑 높이느라 거의 비명처럼 들렸다. "어디예요! 지금 어딥니까!" "언덕 거의 끝이에요! 저 사람 지나가는 사람 아닌 것 같아요! 어머!!" "왜 그래요! 아영 씨!" "어머머!! 뛰어와요! 아아악!" "아영 씨!!!" 검은 그림자가 마지막 모퉁이에서 돌진했다. 되돌아 뛸 틈도 없이 어느새 코앞까지 달려왔다. 반사적으로 아영은 휴대폰을 날렸다. "아악! 저리 가!" "아!" 남자가 이마를 붙들고 허리를 반으로 푹 접은 사이 아영이 언덕 위로 내달렸다. “아이 씨! 뭐야! 피? 아 저게 진짜!" 구둣발이 전속력으로 쫓아왔다. 아영은 우왕좌왕할 겨를이 없었다. 우왕좌왕은 그나마 선택의 여지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복에 겨운 짓임을 이 찰나에 깨달았다. 산으로 뛰어 제 발로 무덤 자리에 들어갈 만큼 정신 줄을 놓지는 않았다. 제정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하 계단을 다다다다 내려가고 있었다. 스스로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철컥 방문을 잠그고 화다닥 뒤로 물러섰다. 가쁜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고개를 치켜들고 학학 숨을 토하느라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심장이 무섭게 요동쳤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날뛰었다. 턱 턱 턱 턱 "허!"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는 구둣발 소리에 소스라쳐 아영이 씽크대 옆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섰다. 문을 열었을 때 그나마 한꺼번에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화장실에 숨을 수는 없었다. 더 좁은 공간에 갇히면 심장 마비로 쓰러질 것 같았다. 철컥! 철컥! 철컥! 문고리가 사정없이 돌아갔다. 송두리째 뽑을 기세로 비틀었다. 아영은 씽크대 옆에 서 있는 접이식 간이 의자를 퍼뜩 들었다. 단단히 움켜쥐고 어깨높이로 쳐들었다. "들어오기만 해! 들어오기만 하면" 쾅! 쾅! 쾅! "아악!" 냅다 후려칠 자세로 벼르고 있던 아영이 두 귀를 틀어막고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버렸다. 플라스틱 의자가 날아가 두 동강이 났다. 동시에 민 대표의 목소리가 지하 계단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봐! 당신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어! 거기서 당장 못 나와!" "아이 씨!" 타타타타 구둣발이 거짓말처럼 순순히 지하를 빠져나갔다. "비켜!" "아! 이봐! 야! 거기 안 서!" 지하 계단 입구에 버티고 서있던 민 대표가 왈칵 떠밀렸다. 넘어지며 잽싸게 치한을 낚아챘다. 그러나 밀고 올라와 냅다 뿌리치는 힘에 밀려 민 대표 혼자 화분 더미 위에 나동그라졌다. 화분을 짚고 밀쳐내며 가까스로 일어나 쫓아 나갔지만 이미 사라진 후였다. 민 대표는 다시 쪽문 안으로 후다닥 들어가, 지하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쾅 쾅 쾅 "아악!" 아영이 두 눈까지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쾅 쾅 쾅 "아영 씨! 나예요! 아영 씨! 문 열어요!" 민 대표였다. 아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온몸이 덜덜덜 떨려 중심을 잡고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문까지 겨우 한걸음 거리가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쾅 쾅 쾅 "아영 씨! 내 말 들려요? 나예요! 괜찮은 거예요? 문 좀 열어봐요!" 아영은 벽을 짚고 더듬더듬 문으로 가 잠김 버튼을 딸깍 풀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계단 마지막 칸 위에 구부정하게 서 있던 민 대표가 방으로 뛰어들었다. "아영 씨! 괜찮아요? 어디 좀 봐요! 아 이런." 눈물과 범벅이 된 화장이 시커멓게 줄줄 흘러내리는 얼굴로 아영이 귀신처럼 서 있었다. 얼굴을 한 대 맞기라도 한 거야? 민 대표의 눈이 경악해 휘둥그레 졌다. "아영 씨! 어디 다쳤어요? 얼굴 맞은 거예요? 괜찮아요?" "아...흐흐흐흑" 아영이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흐흐흡 시작하더니, 난데없이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민 대표가 조심조심 다가가 아영을 품에 안았다.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영은 울음을 참지 않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남 앞에서 추하게 우는 꼴을 감춰야 한다는 절제와 자제력은 이미 잃은 지 오래였다. 꼭꼭 밟아가며 참고 견딘 하루가 이런 식으로 끝난 게 기가 막혀서 결국 이성을 놓아 버렸다. '왜 나만! 왜 자꾸 나한테만!' 주먹을 쳐들어 하늘에다 대고 마구 휘저어 주고 싶었다.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고작 할 수 있는 게 이러고 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게 너무 서러웠다. 가련하게 들썩이는 등을 쓸어 내리는 민 대표의 손이 눈물 버튼 같았다 "괜찮아요. 내가 왔어요. 괜찮아. 이제 안심해요. 내가 있어요." 울음소리가 높아졌다. 어찌할 줄을 몰라, 민 대표는 바들바들 떨리는 아영의 몸을 꼭 보듬어 안았다. 얼마나 놀랐을까. 처음 보는 아영의 무너진 모습에 민 대표는 당황해 버렸다. 그제야 아영을 품에 안고 서 있는 공간이 민 대표의 눈에 들어왔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더 당혹스러웠다. 둘러보기 민망할 정도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초라하고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늘 당당하고 담담하기만 하던 아영의 모습이 그 위에 오버랩되었다. 그 당찬 꿋꿋함이 궁핍보다 더 버겁진 않았을까. 넘겨짚지 않으려 자중해 보지만, 안쓰러워지는 건 민 대표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숨길 수 없이 드러난 할 말 잃은 표정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민 대표는 품에서 흐느끼고 있는 아영을 한동안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자 이제 뚝 해봐요. 어디 얼굴 좀 봅시다." 민 대표가 아이 어르듯 아영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훌쩍훌쩍 어깨 울음을 들썩이고 있는 아영에게서 물러나 얼굴을 기웃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자켓 가슴 포켓에 꽂힌 포켓스퀘어를 꺼내 화장이 떡이진 아영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기름진 화장이 눈물 때문에 마른 손수건으로 닦을수록 더 볼썽사납게 번졌다. "잠깐만요. 혼자 서있을 수 있죠?" "네... 이제 괜찮아요." "얼굴이 아직 안 괜찮아요. 기다려봐요." 민 대표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쏴아 물을 틀었다. 아영이 화들짝 놀라 얼굴을 더듬댔다. 아 이런! 이제야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얼굴이 촛농처럼 흘러내린 것 같았다. 이 얼굴로 입까지 벌리고 목놓아 울어버렸다. 반지하 방이 그런 제 꼴을 더욱 우스워 보이게 했을 테지. 온갖 치부를 다 드러내고 서 있다. 마치 오늘 하루 연타로 몰아친 불행까지 죄다 들킨 것만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민 대표 앞에서 꼿꼿이 고수하고 있던 하나뿐인 자존심이었다. 쨍 금이 가 와장창 쏟아졌다. 민 대표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귀한 몸이 낮고 좁은 화장실 문을 빠져나오는 걸 보기가 송구스럽기까지 했다. 자존심이 바닥을 드러내니 구차함만 남았다. 아영이 시선을 떨구었다. "자 얼굴 들어봐요. 한 대 맞은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제가 할게요. 그냥은 안 지워져요... " "가만있어요. 내가 해줄게. 거의 다 됐어요. 야 여자들 화장이 이렇게 무서운 호신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네요." "예?" "문 열자마자 심장 마비 올 뻔했잖아. 아영 씨 얼굴 보고 기절할 뻔했네. 조컨 줄 알았다니까. 나 그 영화 무서워하거든." 웃으라고 하는 민 대표 말에 아영이 아랫입술을 잘근 아프게 물었다. 조커. 웃프단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정말 웃펐다. "이제야 좀 봐줄 만해 졌군요. 오늘은 여기 있지 말고 나갑시다. 어디 갈 데 있어요? 데려다줄게요. 갈 데 없으면 나랑 같이 가요." "아니요. 호텔에 가면 돼요. 여관도 괜찮고요. 가까운데 좀 내려주실래요?"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예?" "이런 일 겪은 사람 호텔에 내려놓고 갈 만큼 나 강심장 못돼요. 여관은 더더욱 안돼요. 곁에 있어 줄 사람 없어요?" "이제 괜찮습니다. 혼자 있어도 돼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호텔이 편합니다." "고마우면 오늘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해줘요. 저 가방 말고 챙길 거 더 있어요?" "아니요... " "그럼 가죠. 혼자 걸을 수 있겠어요?" "네..." “계단 조심해서 올라와요. 갑시다.” 민 대표가 문 옆에 서 있는 트렁크를 끌고 먼저 계단을 올랐다. 찬혁을 피해 도망가려고 싸놓은 가방이었다. 그 가방이 민 대표 손에 들려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 뻔히 보고도 아영은 무기력해 있었다. 뿌리치고 마다할 여력이 없었다. 충분히 힘들었고, 죽을 만큼 무서운 날이었다. 꼿꼿이 버티기엔 이미 바닥까지 다 보여줘 버렸다. 비참함의 끝을 몸소 증명한 하루였다. 마지막까지 혼자 버틸 자신이 없었다. 아영은 민 대표를 따라 비틀비틀 계단을 올라갔다. 전시회에서 카페로 이어진 계주가 자선 파티 일일 파트너로 바통을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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