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 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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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 서울로 올라오자 마자 찬혁은 곧장 아영을 만나러 갔다. 아니, 쳐들어갔다. 혹시나 연락이 왔을까, 휴대폰을 다시 꺼냈다. 역시나였다. 전화 받아! 어제 오후에 남긴 마지막 메세지가 저 혼자 악을 쓰고 있었다. 아영은 일주일 내내 답이 없었다. 수백 수천 통의 답을 거부하는 대신 이젠 아예 휴대폰을 꺼버렸다. 참 쉬웠다. '신아영! 나 미치는 거 보고 싶지! 어!' 마침내 잡았다고 믿었는데 아영은 또다시 숨바꼭질을 시작하려 한다. 이러고 도망을 가버리니 결국엔 잡아도 잡은 게 아니었다. 잡히지 않겠다 기를 쓴다. 미칠 노릇이었다. "사장님. 도착했습니다." "잠시 기다려요. 금방 옵니다." "예. 다녀오십시오." 윤 비서가 뒷문을 닫고 찬혁의 뒤에서 허리를 절도 있게 굽혔다. 찬혁은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당겨 느슨하게 풀고 건물로 들어갔다. 계단을 두 칸 세 칸 뛰어올라 2층 아영의 갤러리로 돌진했다. 한달음에 달려가 성질났다 보란 듯이 문을 와락 당겼다. 철컹 심장이 철렁했다. 문이 잠겨있다. 방금까지 곧 폭발할 화산처럼 씩씩 뿜어져 나오던 숨이 순간 싸하게 얼어붙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영아! 신아영! 신아영!" 철컹 철컹 철컹 "아 이봐요 아저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옆집 영업 중인데!" 부동산 문이 열리고 중년 여자가 고개만 빼꼼 내밀고 한마디를 팩 날렸다. 자장면 냄새까지 훅 따라왔다. "여기 아무도 없습니까? 관장 어디 있습니까?" "문 잠긴 거 보면 몰라요? 거기 없는 거? 관리실 가서 물어보든가!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가세요!" 찬혁은 1층으로 쏜살같이 내려갔다.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 다급해졌다. 관리실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었다. 관리인이 깜짝 놀라 책상에서 펄쩍 소스라쳤다. "2층 갤러리 뭡니까? 왜 잠겼습니까! 관장 어디 갔습니까?" "아이고 놀래라! 누군데 이렇게 사람 간 떨어지게 이래요? 관장님 찾아요?" "어디 갔습니까? 예?" "아 오늘 나오지도 않았는데 그걸 난들 알겠어요? 안 그래요? 갤러리 문 닫은 것 같네요? 그만둘 것 같은데? 계약 기간 아직 한참 남았는데 괜찮대도 부랴부랴 그러고 끝내시네?" 문 앞에 버티고 서있던 찬혁이 맥없이 돌아섰다. 시작도 하기 전에 진이 쫙 빠진 기분이다. 그러나 지체할 틈이 없었다. 찬혁은 관리실을 부리나케 빠져나왔다. 윤 비서가 운전석에서 나와 문을 열어줄 겨를도 없이 찬혁이 뒷좌석으로 뛰어들었다. "장미마을로 가, 윤 비서!" "예! 사장님!" 찬혁은 휴대폰을 꺼내 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의미한 짓임을 확인하려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 휴대폰은 꺼져 있다. "미치겠네! 신아영!" 찬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윤 비서가 흠칫 놀라 백미러를 번쩍 올려다보았다. 찬혁에게 딴 세상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아영 둘만의 세상에 갇혀 있다. 숨바꼭질만 해야 하는 벌칙 같은 세상에. 꺼져 있는 전화에 부질없는 문자를 또 남겼다. [지금 간다! 꼼짝 말고 거기 있어! 없기만 해! 잡히면 가만 안 둬!!] 벌이 확실하다. 미쳐 돌아가는 벌. 이렇게 몰고 가는 아영이 이젠 의문스럽다. 왜 이렇게까지 잔인한 건지. 왜 가혹하게 구는지. 수천수만 번 반복한 미안해. 그 말 말고 다른 사과의 말이 있는 건지. 그걸 찾는 게 이 숨바꼭질을 끝낼 미션인 건지. 의문이 엉뚱한 미션으로 꼬리를 물었다. '돌겠네! 진짜!' 언덕 아래 차가 서자, 찬혁이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윤 비서가 퍼뜩 차에서 뛰어 내렸지만, 대로변에 차를 두고 뒤따라 갈 순 없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제자리에서 맴을 돌며 언덕을 굽이굽이 달려 올라가는 찬혁만 목을 빼고 올려다보았다. 언덕 끝에서 찬혁이 거친 숨을 헉헉 토해냈다. 허리를 꺾고 난간에 매달려 숨을 고르고 골랐다. 지금 심장이 미친 듯 질주하는 건 언덕을 뛰어왔기 때문만이 아니란 걸 찬혁은 안다. 불길한 예감은 비껴가지 않는다. 결과를 예측할 때 그렇다. 커피를 쪼로록 쪼로록 내리고 있을 아영이, 매트리스에 오도 마니 앉아 기다리고 있을 아영이, 방금 감은 머리를 수건에 돌돌 말고 문을 열어줄 아영이 저 안에 없다는 건 정말. 정말. 예측하고 싶지 않다. 찬혁이 쪽문을 삐걱 열었다. 어지럽게 넘어져 있는 화분을 발로 쳐내고 지하로 내려갔다. 방문이 열려있다. 한낮에도 컴컴한 지하 바닥에 문틈에서 삐져나온 빛 금이 노랗게 처져 있다. 찬혁은 방문을 발로 훅 밀었다. 쿵 벽에 부딪히고 되돌아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온다는 문자를 확인한 거야 뭐야. 불도 켜놓고 화장실 세면대 수도꼭지도 미처 다 못 잠그고. 바닥에 뒹구는 플라스틱 의자까지. 부랴부랴 내뺀 긴박함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이가 없네. 픽 헛웃음이 터졌다. "뭐 하자는 짓이냐 신아영. 엿 먹어라. 어. 놀아보자 이거지." 찬혁은 플라스틱 의자를 있는 힘껏 집어 찼다. 쨍그랑! 반지하에 걸린 반쪽짜리 유리창이 와장창 쏟아졌다. 지이잉 지이잉 또다시 혹시나. 찬혁은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재빨리 꺼냈다. 역시나 아니었다. "뭐야!" "뭐야? 왜 이렇게 화났어? 무슨 일 있어? 지금 서울이지?" "뭐냐고. 아 끊어." "박찬혁! 시작도 안 했는데 뭘 끊어 끊기는. 서울 오면 연락해달라고 했잖아. 너야말로 뭐야. 언제 올 거야?" "누가 간댔어?" "그러지 말고 좀 도와주면 안 돼? 나 대표 되고 첫 기념행사인 거 알잖아. 자선 행사야. 너도 자선 좀 베풀라고."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생각이 없지? 네 행사에 전세기를 대달라니, 그게 뇌가 있는 놈이 할 소리야? 분수에 맞은 이벤트를 해. 남의 돈으로 생색낼 생각 말고."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니? 누가 그냥 쓰재? 빌리자고. 돈 준다고." "미친 거 맞네. 뇌 없다고 너." "누가 뇌가 없는지 내기할까? 아니면 누가 더 미쳤나?" "뭐? 하아! 됐다. 그만하자." "알았어! 그럼. 생각 조금만 더 해보고 오늘 중으로 전화해줘. 행사 일주일 전이야. 이벤트 경품 공지 올려야 된단 말야." "끊어. 바뻐." "나두. 아영 씨랑 미팅 있거든. 일봐. 전화하고~ 끊을게." 전화가 끊겼다. 순간 어리둥절해 버렸다. 찬혁은 종료된 휴대폰 화면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잘못들은 줄 알았다. 미팅? 일상이 가능한 아영이 기가 막혔다. 반지하 방에 서 있는 제 꼴은 그럼 뭐지. 병신이 따로 없다. 전화를 걸었다. "빨리 결정했네? 올 거야?" "미팅 언제야." 리나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어머. 신 작가님. 일찍 오셨네요. 잠시만요." 리나가 다시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통화는 이미 종료되어 있었다.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리나는 문 앞에 우뚝 서 있는 아영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서 있지 말고 와서 좀 앉아. 차 한 잔 줄까?" "굳이 그 얘길 대표님 통해서 전해야 했니? 구질구질 하다더니, 뒷담화로 딱 이었겠네." "뭐가 너무 없으면 그렇게 되나? 자존심이라고 봐 줄래도 뭐가 이렇게 배배 꼬인 것 같지? 그거 꼴불견이야 아영아. 꼴에 자존심." "뭐...?" "네 휴대폰이 꺼져 있길래 혹시나 해서 민 선배한테 전화해본 것뿐이야. 어젯밤, 네 전화 받고 도와줄 게 있을까, 싶어서 나름 고민한 사람한테 할 소린 아니잖아? 호의를 그런 식으로 오해하면 곤란하지. 그리고 민 선배한테 들었어. 너 어젯밤에 큰일 날뻔했다고. 걱정도 됐고." 하! 속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걱정이란 게 뭔지 알기나 하는 사람의 얼굴인가. 모르쇠 연기 외엔 할 줄 아는 연기가 없는 거야? 걱정을 말하고 있는 리나의 무심한 표정이 섬뜩한 건 적진에 홀로 서 있다는 뒤늦은 자각에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탓일까. 아영은 완전히 ‘을’이 되어 찌그러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래저래 힘들 것도 같고." "그래서 용건이 뭔데. 백경아랑 거래 끝났다며. 그 일로 나랑 볼 일이 뭐야?" "자. 받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백경아 씨 소재야." 리나는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쓱 밀어 놓았다. 자석에 달라붙듯 아영이 책상 앞으로 후다닥 다가갔다. 종이를 집어 들고 들여다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아영의 미간이 점점 일그러졌다. 벤쿠버? 종이를 든 손이 툭 떨어졌다. 도움이라고 받은 건 절망이었다. 가도 너무 멀리 가버렸다. 어떻게든 되찾아야 할 돈이 태평양을 건너갔다. 희망이 물 건너갔다. "... 도움. 고맙다. 갈게." 아영이 돌아섰다. 문까지 참 멀기도 했다. 축 처진 뒷모습을 보여서 마지막까지 희열을 만끽하게 해주기 싫었다. 꼿꼿이 걸었다. 아무렇지 않은 걸음을 애써 보였다. 그래서 털끝만큼이라도 실망을 맛보게 할 수만 있다면. 맞다. 배배 틀린 거. 꼴에 자존심. "도움 필요할 땐 언제든지 연락해.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지 말고. 상부상조 아직 유효하니까." 리나의 적선이 날아왔다. 아영의 꼴 난 자존심을 가차 없이 무너뜨렸다. '하아!' 룸 중앙에서 전의를 상실한 두 발이 주춤하는 사이 문이 벌컥 열렸다. 잔뜩 열이 뻗쳐 있는 찬혁이 난폭하게 들이닥쳤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아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나 극적이라 아영은 이 상황이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중심에 서 있었다. 리나와 찬혁 둘 사이에. 왜 하필 지금? 여기서? 아영의 당황이 최고조에 다다른 순간, 리나의 마지막 말이 피날레를 장식했다. "신 작가님? 민 선배 집이 혹시라도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저희 오피스텔 알아봐 드릴게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퇴장 큐가 잔혹하게 떨어졌다. 아영은 저승사자처럼 시커먼 아우라를 뿜어내며 문 앞에 버티고 선 찬혁을 후다닥 빗겨나 방을 뛰쳐나왔다.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뛰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에 가까스로 올라탔다. 철컹 찬혁의 손이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젖혔다. 예상했던 대로다. 따라서 올 걸 알았다. 너무 뻔해 아영은 이 상황이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강제로 철커덩 열리는 소리가 오히려 더 놀라웠을 정도다. 무슨 말을 할지도 뻔했다. 문자 테러에 초토화된 아영의 정신상태에도 맷집이란 게 생겼다. 리나의 마지막 말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겠지. 얼마든지.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엉뚱한 질문이 날아왔다. "탈까?" 아영의 생각 회로가 순간 작동을 멈췄다. 그리고 방금 받은 질문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아니, 해야 할 대답의 후폭풍을 따지고 있는 게 맞았다. 단 두 개뿐인 답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얼어있었다. 어떤 대답을 해줘도 예상되는 결과는 두려웠다. "대답 잘해." 타도 무섭고 안타도 무서웠다. 어차피 찬혁이 원하는 건 단 하나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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