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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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혁의 손이 엘리베이터 문에서 떨어졌다. 놓아주고도 몇 초 동안 문은 닫히지 않았다. 그는 버튼이 조로록 붙은 벽 앞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아영을 뚫어버릴 기세로 응시했다. 태워버릴 것처럼 이글이글 노려보았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아영이 먼저 눈길을 돌렸다. 그녀의 아랫입술이 이 사이에서 잘근잘근 짓이겨져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극도의 긴장을 버티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있다. 거짓말. 청개구리 새끼. ‘아니’라는 아영의 부정은 그러니까 긍정이다. 찬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동의했다. 기대해라."   서서히 닫히는 문 사이로 그의 선전포고가 날아왔다. 말에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아영이 벽으로 턱 넘어졌다. ‘타. 타지마.’ 두 개의 대답 중 하나는 분명 부정이다. 그러나 찬혁은 어느 답이 나와도 긍정으로 받을 게 뻔했다. 타라고 해서 죽일 듯 물고 빠는 키스를 받느니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정신을 차릴 시간이 필요했다. 리나의 갤러리였다. 이곳에서 넋 놓고 당할 순 없으니까. 그러나 찬혁이 말한 동의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괴롭힘에 동의할 만큼 미치지 않았다. 아직은. 그러니 기대는 금물이다. 아영은 머리를 세차게 털어버렸다. 오늘 하루 해결해야 할 문제만 해도 눈앞에 산더미다. 시작부터 일진이 사납다. 제발. 성호를 긋자 '아멘'이 절로 터졌다. 아무래도 성당을 다시 나가야 할까 보다. 마귀를 상대하기엔 혼자는 역부족이었다.   갤러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와 아영은 노원역 지구대로 향했다. 간밤에 뒤늦게 출동해 쪽문 안을 기웃대던 경찰관 두 명과 지구대로 먼저 가야 했다. 사건 경위를 진술하고 치한의 이마를 명중시키고 장렬히 날아간 휴대폰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었다. 아무리 급해도 제 발로 사건 현장에 다시 갈 순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산산이 깨지지 않았기를. 그래서 오늘 개인 교습이 불발로 날아가지 않기를. 아영은 서둘렀다.   지구대 안은 한산했다. 아영은 카운터로 다가갔다.   "어떻게 오셨죠?"   "네. 어젯밤에 장미마을에서 치한 신고했던 사람인데요. 신아영이라고. 혹시 제 휴대폰이 여기 와있나 해서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신.. 아영... 아 그 사건 노원경찰서로 넘어갔습니다. 그리로 가보시죠."   "예? 경찰서로요? 왜요? 다행히 무사했는데요?"   "휴대폰에서 혈흔이 발견됐어요. 몸싸움은 없었다고 하신 것 같은데? 본인 혈흔이 아닌 거 확인 해주시고 받아가세요."   "아... 예."   꼬이기 시작한다. 아영의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이마가 깨진 거야? 도둑을 때려잡고도 폭행 전과자가 된 한 남자의 기사를 봤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과잉정당 방위라고 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린가 했었다. 어느 나라 법인지 참 개떡 같다고 제 일처럼 분개했었다. 그게 제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움이 필요했다. 박찬혁. 머릿속 쳇바퀴에서 제일 먼저 튀어나온 로또 볼은 또다시 찬혁이었다.   "저 전화 한 통만 써도 될까요?"   "예. 저기 민원신고 책상 보이시죠? 저 전화 쓰세요."   "감사합니다."   아영은 전화를 걸었다.   "... 대표님. 저예요."   "아 아영 씨.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전화가 안 되니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네요. 어딥니까? 아직 채 대표랑 있어요?"   "아니요. 밖입니다. 저... 지금 안 바쁘시면 저와 어디 좀 같이 가주실 수 있으신지요?"   "지금이라, 음. 시간 괜찮아요. 어디를 가는 데 내가 필요하죠? 이거 데이트 신청입니까? 기대되는데? 어디 가게요."   "... 노원경찰서요."       ***       경찰서 안은 분주했다. 지구대와 사뭇 분위기도 달랐다. 사복형사들의 모습은 스트레스에 절인 파김치 같았다. 그래서일까.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분위기가 조마조마해 보였다. 아영의 두 손이 무릎 위에서 동그랗게 뭉쳐졌다. 꼬옥.   "긴장돼요?"   "네. 조금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있잖아요."   민 대표가 찡긋 윙크했다. 시기적절한 위로인지 아영은 순간 헷갈렸다. 민 대표가 있다고 해서 있던 폭행죄가 사면될 건 아니었다.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곁에 누군가가 있어 줘서, 그것도 듬직한 남자여서 주눅이 덜 드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아영은 걱정과 안심 사이에서 적절한 리액션을 찾지 못해 흐 애매하게 웃는 것으로 속을 드러내 버렸다. 민 대표의 손이 아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신아영 씨. 이쪽으로 오시죠."   "네!"   아영은 스프링처럼 발딱 일어나 맨 끝 책상에 앉아있는 형사 앞으로 다가갔다. 민머리가 찡그린 인상을 더욱 험악하게 만들었다. 그 앞에 아영이 다소곳이 섰다.   "앉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같이 오신 분은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아..."   "직장 동룝니다. 어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접니다."   민 대표가 명함을 꺼내 건넸다.   "제일 갤러리. 민 영환. 대표? CEO 시네?"   제일 그룹, 제일백화점. 이름 그대로 내로라하는 국내 굴지의 기업 갤러리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형사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서울말에 아직 길들지 않은 사투리가 왠지 짓궂게 들렸다. 주눅은커녕 오히려 명함을 앞뒤로 뒤집어 보며 뭔가 좀 더 자극적인 걸 찾는 듯도 보였다. 형사는 심드렁하게 명함을 내려놓았다.   "신아영 씨. 어제 몸싸움 같은 건 없었다고 했죠? 그런데 핸드폰에 피가 묻어 있거든요?"   "예. 몸싸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갑자기 달려드는데 너무 놀라서 그랬습니다."   "때렸습니까? 핸드폰으로? 마빡을?"   "정당방위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당하고 있을 순 없잖아요. 휴대폰 아니라 더한 거였어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용감하시네. 잘~ 했습니다."   "예?"   "그런 새끼들은 대가리를 쪼개도 싸지."   형사의 섬뜩한 혼잣말이 이렇게 큰 위안이 될 줄이야. 곧추세우고 있던 아영의 긴장이 와르르 풀렸다. 형사는 앞으로 종이 한 장을 밀었다.   "거기 적힌 병원에 가서 혈액형 검사하고 휴대폰 찾아가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민영환 씨. 그놈 얼굴 봤어요? 다시 보면 알아볼 수 있겠어요?"   "글쎄요. 어두운데다 갑자기 떠밀려 넘어지는 바람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   "흠. 범인 잡히는 대로 두 분 한 번 더 오셔야 하니 그렇게 알고 그만 가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아영은 깊이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당당하게 물러났다.   "대표님. 같이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네요. 얼른 들어가 보세요.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병원부터 가죠. 휴대폰 찾는 거 보고 갈게요."   "아니에요. 병원이 요 근처라 금방 끝날 것 같아요. 저 혼자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니까. 금방 끝내고 헤어집시다. 연락 안 되는 상태로 헤어지면 여기 같이 온 보람이 없잖아. 자 타요."   "예. 감사합니다..."   예상대로 상황은 일사천리로 빠르게 종료되었다. 휴대폰을 손에 넣자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아영은 민 대표와 헤어지자마자 휴대폰 전원을 켰다. 귀퉁이 유리가 깨져 화면 위에 하얗게 거미줄이 쳐진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 살아있었다. 제일 먼저 찬혁의 문자 폭탄이 창 위에 떠 있는 게 보였다. 보나 마나 가만 안 둬! 일 테지. 아영은 확인하지도 않고 밀어버렸다. 그리고 소개받은 개인 교습 학생의 집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네에~ 청담동입니다~"   학생의 집은 청담동인가보다. 콧소리에 부티가 잔뜩 묻어 날아왔다.   "아 네. 안녕하세요. 신 아영이라고 합니다. 서울문화예술대학 문동욱 교수님 소개로 전화 드렸어요. 개인 교습 필요하다고 하셨죠?"   "아~ 어머 한국을 빛낸 100인의 아트스트? 이렇게 전화 주시고. 영광입니다. 교수님 칭찬이 워낙 자자 하시던데 신원이야 보장된 것 같으니 신원조회서는 생략할게요~"   뭐지? 아영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다시 경찰서에 앉아있는 기분까지 들었다. 상위 사람들이 하위 사람들을 대면하는 방식인가 보다. 신세계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소스라친 것은 행여나 신원조회서를 제출하라고 다시 요구하면 어쩌나 하는 자격지심이었다. 세상에 혈혈단신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닌 이상 부모 기재란을 비워둘 순 없으니까. 그러나 다행히 쿨하게 본론으로 넘어가 주었다.   "우리 노아 얘기 교수님께 들었죠?"   "네. 재능 있는 학생이라고 칭찬하셨어요. 기대가 많이 됩니다."   "워낙에 자유로운 영혼이라 작품세계는 어릴 때부터 탁월했어요. 그런데 제대로 된 선생을 못 만나서 아직 빛을 못 보고 있네요. 한국을 빛낸 아티스트라고 하니 우리 노아 맡겨도 되겠죠?"   대답을 아영에게 넘겼다. 아이의 실패에 대한 책임도 무언의 압박으로 함께 따라왔다. 아영이 할 대답은 네.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불성실과 재능의 부재, 거기다 개념을 상실한 정신상태까지 선생의 자질 부족으로 덤탱이를 쓸 순 없었다. 문 교수한테 들을 만큼 들었다. 주의가 신신당부로 따라온 건 당연했다. 하지만 수업료가 두 배였다. 심장마비를 대비한 위험수당 내지는 생명 수당이 붙었다고 보면 된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아영은 마다할 수 없었다. 돈이 필요하다. 절실했다. 하지만 안전거리를 유지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탐색의 시간이 선행되어야 했다.   "일단 노아를 먼저 만나보고 싶은데요. 그동안 그렸던 작품들도 보고 싶고요. 그래야 앞으로 제가 뭘 어떻게 해줄지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고 난 후에 할지 말지도 결정하겠습니다. 수준 미달일 경우 주어진 시간 안에 원하는 결과를 내드릴 순 없으니까요. 피차 시간 낭비하면 안 되죠. 제시간도 소중하니까요."   세게 나갔다. 조마조마했다. 그럼 됐다고 할까 봐 간이 콩알만 해졌다. 대답이 뜸을 들였다. 아영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역시. 제일 갤러리에서 안 놔 줄만 하네요. 이번 가을 정기 특별전 초대장 받았네요. 벌써 세 번째 작업이라고 하던데, 괜한 소린 아니군요. 당차고 자신만만한 게 맘에 드네요. 믿고 맡겨볼게요. 선생님. 우리 노아 잘~좀 부탁합니다."   후우. 아영은 남몰래 숨을 내쉬었다.   "노아 연락처 보내드릴게요. 직접 연락해보실래요? 요즘 엄마 말 듣는 애들이 어디 있어야 말이죠. 둘이 스케줄 잡고 시작하게 되면 그때 다시 전화 주세요. 그럼 들어갑니다~"   물러갑니다. 도 아니고, 모호한 끝인사로 상대를 낮추는 것도 청담동 사모님이 갖춰야 할 소양인 것처럼 고상하게 들렸다.   띠링   메시지가 들어왔다. 노아의 번호였다. 아영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재발신도 소용없었다. 세 번째 재발신 후 하는 수 없이 문자를 남겼다. 그리고 길가에 보이는 아무 분식집에 들어갔다. 오늘 첫 끼였다. 허기진 거는 같은데 입맛은 영 안 돌았다. 그래도 일하려면 먹어야 했다. 언제는 맛으로 먹었었나. 아영은 김밥을 오뎅 국물에 푹 적셔서 의무적으로 씹어 삼켰다.   띠링   생각보다 답이 금세 왔다. 선생들을 골탕 먹인 전적으로 봤을 땐 이도 저도 못 하는 새벽에 올 줄 알았는데. 응? 아영이 휴대폰을 눈앞에 바짝 들어 올렸다.   [강남역 10번 출구. 오아시스. Room 7. 낙원. 9 pm. ㅋㅋㅋ]   암호 같은 약속 장소 문자였다. 한 단어 한 단어 생소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중에 아영의 눈을 의심케 한 것은 다름 아닌 마지막 ‘ㅋㅋㅋ ’였다. 단 세 개의 된소리 자음이 사람 기분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데 새삼 놀랐다. 숨은 의미를 김밥과 함께 곱씹어보았다. 선생의 실패를 미리 조소하는 듯했다. 못된 장난을 준비해놓고 그새를 못 참고 큭큭 대나? 시간을 확인한 후 휴대폰을 내려놓고 아영은 김밥에 몰두했다. 머릿속에서 자음 세 개가 좌충우돌 맴을 돌았다.   ㅋㅋㅋ   기분이 쌔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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