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혁은 한 놈만 팬다의 정석을 보여주었다. 노아의 얼굴이 찬혁의 주먹에 묵사발이 되어갔다. 노예근성을 논하던 노아의 입은 피를 켁켁 뱉어냈다. 여자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로 위아래만 겨우 가린 채 악을 쓰며 뛰쳐나갔다. 아영을 킬킬 조소하던 남자들이 짓이겨진 노아를 보고 기겁해 도망치다 찬혁의 발길질에 개똥처럼 나뒹굴었다. 볼썽사납게 던져져 끈끈이 개구리처럼 유리창에 탁 붙었다 떨어졌다. 테이블을 쓸어 내리고 카펫 위에 나동그라졌다.
찬혁은 지옥에서 온 사신 같았다. 가차 없고 잔인했다. 낙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나서야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찢어진 자켓을 벗어 바닥에 내던지고 거친 숨이 헉헉 터지는 입을 피 묻은 손등으로 쓱 밀어냈다. 아영은 문가 벽, 안쪽 구석까지 벌벌벌 밀려났다. 기암을 토하는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고 장승처럼 서서 그를 두렵게 바라보았다. 얼굴에 튄 피가 그의 피인지 노아의 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얼굴에서 피를 닦아내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찬혁이 겁에 질린 아영을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여기선 또 뭐하냐?"
그건 오히려 아영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기가 찬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찬혁이 더 기가 찼다. 그러나 반문할 겨를도 답해줄 틈도 주지 않고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대며 다가왔다. 위협적이었다. 악의 사신 같은 몰골로. 낙원을 지옥으로 뒤집어 놓고!
'설마! 여기서? 미쳤어?'
아영은 입부터 화들짝 가렸다. 이건 아니었다. 영화도 삼류영화가 따로 없다. 피하고 싶지만, 코너에 박혀 있다. 보나 마나 어디로도 못 도망가게 손으로 양쪽 벽을 턱 막아버리겠지. 그리고 잔혹한 분풀이를 시작하겠지. 엘리베이터에 발도 못 올려보고 퇴짜 맞은 걸 앙갚음하겠지. 숨도 못 쉬게 집어삼키겠지! 기대하라던 건 바로 이런 거겠지!
"난 동의하지 않았어! 분명히 말했다! 그러니까 키스는 용납 못..."
"따라와!"
"허!"
필사적으로 입을 사수하고 있던 손이 낚아채여 와락 끌려갔다. 키스보다 더 난감하고 당황스러웠다. 키스를 상상한 거야? 이 타이밍에?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확실했다. 아영은 노원경찰서 민머리 형사의 섬뜩한 말이 순간 가슴에 확 와 닿았다.
대가리를 쪼개도 싸지.
방안을 보고 기겁을 하고 서 있는 무리를 밀치고 찬혁은 아영을 끌고 나갔다.
"찬혁아! 야 자식아! 그냥 가면 어떡해! 야! 얌마!!"
방 안의 상태를 촬영하고 동영상을 찍어 대던 민혁이 찬혁을 불러 세웠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각 방에서 쏟아져 나온 구경꾼들을 해치고 복도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속수무책으로 딸려가며 아영이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어디 가는 거야! 저 꼴을 만들어 놓고 도망가면 어떡해! 이거 놔!"
"그러니까 도망가야지. 여기서 잡히면 너랑 또 얘기도 못 해보고 헤어질 거 아냐."
"뭐? 미쳤어? 폭행하고 도주하면 가중처벌 된다는 것쯤은 초등학생도 알겠다! 멈추라고!"
"맞아도 싼 새끼! 법무팀이 왜 있게.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법무팀. 하! 있는 것들의 뒤는 죄다 법무팀이 봐주나 보다. 리나의 조롱 섞인 비아냥 속에도 어김없이 법무팀이 등장했었다. 저 혼자 처리하지도 못 할 짓을 왜 퍼질러놓고 도망을 가? 아영은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간 찬혁이 원망스러웠다.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엔 아영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의 일에 뛰어들어서 왜 일을 이 꼴을 만들어놔? 내가 다 처리한 걸 왜 엉망으로 망쳐놔? 흑기사라도 되는 줄 알아? 사람을 왜 벼랑 끝에 세워놓냐고!"
"나 아니었으면 너 이미 벼랑에서 떨어졌어! 반 죽었다고! 알아? 그 방이 어떤 방인 줄 알고 겁도 없이 거길 들어가! 어! 그 새끼들이 부모 몰래 모여 앉아 담배나 피워대는 고삐리로 보였어? 어디 겁대가리 없이 그 앞에서 되지도 않은 훈계 질이야! 타!"
심장이 철렁했다. 반죽음! 자칫하면 당했을 뒷일이 문짝에 날아와 깨진 술잔에 이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쳤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더는 반항할 힘을 잃어버렸다. 아영이 종이 인형처럼 펄럭 차 안으로 던져졌다. 차가 급발진으로 지하 주차장을 끼기긱 빠져나갔다.
찬혁은 말없이 앞 유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차를 몰았다. 속도계가 제한 속도를 넘긴 지는 이미 오래였다. 코너를 돌 때마다 몸이 사정없이 쏠렸다. 아슬아슬 비껴가는 차들의 경적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아영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가슴 앞을 가로지르는 안전벨트를 움켜쥐고 마네킹처럼 꼿꼿이 미친 질주를 버텼다. 다행히 도주는 금세 끝났다. 벌컥 앞으로 쏠리는 몸이 안전벨트에 턱 당겨져 등받이에 풀썩 떨어졌다. 차가 멈췄다. 아영은 앞 유리 너머를 빠르게 살폈다. 머리 위로 다리가 보였다. 그 아래로 불빛이 흘렀다. 한강 변 어디쯤인 것 같았다.
찬혁이 안전벨트를 풀고 홱 돌아앉았다. 매몰찬 동작에서 여전히 화가 느껴졌다. 아영은 돌아보지 않았다. 구해줘서 고맙단 인사를 하기엔 저질러놓은 일이 너무 기가 막혔다. 감당해야 할 사람은 청담동 사모님이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다쳤어?"
걱정이 날아왔다. 의외 질문에 팩 쏘아붙이려 단단히 벼르고 있던 아영의 준비 자세가 와르르 무너졌다. 돌연 아이처럼 웅얼대 버렸다.
"아니..."
"그럼 비명은 왜 지른 거야. 사람 간 떨어지게. 어디 봐. 다쳤나 보게."
찬혁은 틀고 있는 아영의 얼굴을 돌려놓고 들여다보았다. 이리저리 홱홱 돌려가며 꼼꼼히 살폈다.
"얼굴은 말짱하네. 다쳤으면 어쩔뻔했냐. 안 그래도 못생긴 게."
"됐다고!"
아영은 찬혁의 손을 밀쳐냈다. 턱을 붙들고 홱홱 돌려대는 몰인정 때문이었는지 못생겼다는 품평 때문이었는지, 둘 다 때문이었는지,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미쳐. 아영은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가련한 체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약한 모습을 보여 찬혁의 심금을 울릴 의도 또한 전혀 없었다. 그는 눈물에 약했다. 심술궂은 악어의 눈물 찔끔 한번에도 늘 대역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걸 노린 게 아니었다. 이 눈물은 안도감 때문이었다. 찬혁이어서.
"뭘 잘했다고 울어?"
찬혁이 아영의 볼에서 눈물을 거칠게 밀어냈다. 눈물이 쏙 들어갔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눈물을 싹싹 닦아냈다.
"말해봐. 거긴 왜 들어간 거야."
"... 과외 소개받았어. 노아라고."
"요즘은 과외를 나이트에서 하나? 말이 되는 소리야? 돈 얘기는 그럼 뭐야. 돈으로 그 새끼랑 뭐 얽힌 거 있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아영은 망연자실해졌다. 돈 때문이었다. 그 돈 얘기를 하자면 파라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신아영과 1차 뛴 새끼 나오라고 깽판을 쳤던 찬혁의 그 만행이 시발점이었으니까.
"왜 말 못 해? 그런 거야? 맞아?"
"하. 아니야. 아니라고.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라고! 파라오에서 왜 그랬어? 왜 남에 방에 들어가서 죄 없는 사람을 두드려 팬 거야? 왜 남에 비즈니스를 그 지경으로 다 때려 부숴놔?"
"넌 비즈니스를 주로 룸에서 하는구나? 순진한 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 숙맥이었네! 비즈니스 하자고 여자를 룸으로 불러들이는 새끼하고 뭐? 비즈니스를 해? 옷 홀랑 벗고 기다리는 새끼랑? 그딴 게 비즈니스면 다 때려치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안 해. 못해. 네 덕분에 다 때려치우게 됐어! 그거 힘들게 섭외해서 개설한 누드 크로키 수업이었어. 무려 3개월 치 회원비였다고. 대출금에 다 쏟아 부어버렸는데 너 때문에 수업이 날아가 버렸어! 그러니 어떡해? 과외라도 뛰어야지. 근데 그것마저 망했네? 더럽고 비참해도 참고 거기까지 들어갔는데, 사정하고 매달리게 해보려고 보란 듯이 사진까지 찍었는데, 이제 어떡해? 내가 가서 사정하고 빌어야 하게 생겼는데?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제 알겠어?"
"그래서 그동안 연락 안 한 거야? 그거 해결한다고?"
"뭐? 하아!"
점점 가관이다. 죽어 넘어가는 사람 앞에 놓고 전화 안 받았다고 따지고 있다. 이러다 죽어도 전화 안 받아준 게 분하고 억울해서 장례식장에 와 울 인간! 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거냐고."
답할 수 없는 추궁이었다. 못 받은 게 아니고 안 받은 거니까. 받으면 안 되니까. 하얀 거짓말.
"어..."
아영이 아랫입술을 물어 댄다. 내리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긴장해 손가락까지 배배 꼬고 있다. 눈물이 아영의 손등에 똑 떨어졌다. 거짓말. 청개구리 새끼. 이 상황까지 내몰려도 아영이 진심을 숨기고 있다. 찬혁의 이마에 주름이 아프게 지나갔다. 찬혁이 아영의 손깍지를 팩 당겨 풀어버렸다.
"안 다쳤다며 다쳤잖아. 바보 같은 게. 제 살 아픈 것도 못 느끼는 거야?"
깨진 유리 파편이 날아와 박혔던 자리에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찬혁은 아영의 손을 끌고 가 팔뚝을 눈앞에 바짝 쳐들고 유리 조각이 박혀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유리는 빠졌네. 대충 붙이고 가. 집에 가서 소독하고..."
컴파트먼트를 뒤져 밴드를 찾아 상처 위에 붙이다 말고 찬혁이 말끝을 흐렸다. 아영의 집은 절대 산꼭대기 반지하 방이 아니었다. 파라오에서 오아시스 낙원까지 그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민 선배 집은. 왜 거기 있는 거야. 나 피해서 기껏 도망간 게 거기야?"
"피해서 도망간 건 맞는데. 너는 아니야."
"무슨 소리야. 무슨 일 있었어?"
"치한... 만났어. 언덕에서."
"뭐? 근데 왜 전화 안 했어! 어!"
"너 목포에 있었어. 전화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도움이라도 보내줬을 거 아냐! 아 이런 바보 새끼! 그래서. 민 선배 부른 거야?"
"마침 대표님 전화가 왔어. 다행히. 그래서 잠시 하룻밤만 신세 진 거였어. 옮길 거야."
"치한은. 잡혔대?"
"아니. 달려들길래 휴대폰 집어 던졌는데 이마를 다쳤나 봐. 난 무서워서 보지도 않고 도망쳤어. 대표님이 마침 집 근처에 와계셔서 달려와 주셨고. 덕분에 치한은 도망갔고."
"차아! 미치겠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없어... 전화 그래서 못했어. 휴대폰 오늘 노원경찰서에 가서 찾았거든."
"거긴 누구랑 갔어. 또 민 선배?"
"어..."
하. 아영은 답답해졌다. 속에서 한숨이 터졌다. 기승 전 얘기가 민 대표로 결론이 나버렸다. 이게 아닌데.
"나 서울 있는 거 알면서 왜 민 선배야 또?"
"너 화나 있었잖아. 엘리베이터에서 그러고 헤어졌는데 어떻게 전화를 해..."
"염치는 있다? 그럼 난 언제 부를 건데. 언제 써먹으려고 이렇게 아끼지?"
"......"
아마 써먹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없어야 한다. 아영의 입술이 잘근잘근 물렸다.
"호텔로 들어와. 토 달 생각하지마. 시키는 대로 해. 너 민 선배 집에 있는 거, 그게 말이 돼? 싫으니까 당장 나와. 딴 데도 못 보내. 그런 줄 알어."
"하지만... 흡!"
반박이 시작과 동시에 찬혁의 입술에 막혔다. 이의를 제기하려던 입술을 거칠게 물고 가차 없이 응징을 가했다. 아영의 이 사이에서 잘근잘근 물리던 입술이 이젠 찬혁의 이 사이에서 짓이겨져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안전벨트에 묶인 채로 아영은 의자에 쑤셔 넣어 졌다. 찬혁이 입안 가득 밀고 들어왔다. 호흡이 빨라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반항은 무리수였다. 반항... 하고 싶지 않았다. 허우적대던 손을 그의 목에 감았다. 입속을 헤집던 혀를 물리고, 찬혁이 가슴 밑에서 학학 얕은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기대했어?"
"......"
“왜 대답 못 해.”
아영은 헷갈렸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찬혁이 던진 선전포고였다. 동의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러니 기대는 금물이었다. 그런데 헷갈렸다. 했는지 안 했는지. 당황스러웠다. 다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동의한 거다."
털컥
"허!"
의자가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