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동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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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에 대한 합의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차를 에워싼 경찰관들이 전기 총을 꺼내 조준하고 곤봉을 빼 들었다. 낙원의 처참한 광경으로 경찰에 비상이 떨어졌다. 곧바로 지명수배가 내려졌고, 찬혁을 검거하기 위해 경찰차 4대가 출동했다. "꼼짝 마! 움직이지 마! 동작 그만!!" 꼼짝하면 안 됐다. 움직이지도 말라고 악을 쓴다. 순순히 응해야 했다. 찬혁과 아영은 이제 폭행범과 공범이었다. 차 안의 움직임이 멈추자 경찰 곤봉이 시커멓게 썬팅 된 차 창문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텅 텅 텅 텅 텅 텅 "창문 내려! 내려! 얼른 내려!" 지이이잉 창문이 내려졌다. 서서히 드러나는 차 안 광경에 경찰들이 일제히 움찔! 운전석에 있어야 할 폭행범이 조수석에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가슴 밑에서 꼼지락 얼굴을 숨기는 공범. 순간 어색한 침묵이 대치하고 있는 두 진영에 무겁게 떨어졌다. 아 씨... 찬혁의 입에서 욕이 나지막이 터졌다. 검거 때문이라 하기엔 어딘가 여운이 짙게 깔린 리엑션 이었다. 그의 반응에 아영이 소스라쳤다. 제정신이야? 아쉬워할 상황이냐고! 검거는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아니, 붙잡히기 전에 제 발로 자수할 찬혁이었다. 그 어느 쪽이 된다 해도 풍기문란죄가 추가되리란 것은 그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도 시도조차 못 해보고. "사람을 초 죽음으로 만들어놓고 사건 현장에서 멀지도 않은 강변에서 떡 하니 카섹스를? 야 살다 살다." 개탄이 날아왔다. 말세다 소리였다. 그렇다. 풍기문란이라는 죄명이 가소롭게 들릴 만큼 사이코 짓이 아닐 수 없다. 폭행 이후의 행적은 그야말로 9시 뉴스 특종 감이었다. 아영의 영혼이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정신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이내 차 문이 왈칵 열렸다. "내려! 나와! 둘 다 손 머리 뒤에 붙여!" 찬혁이 끌려 내려 차에 얼굴이 처박힌 채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죄목은 상해죄. 미란다 원칙이 고지되었다. 뒤이어 내린 아영도 홱 돌려 세워져 수갑이 채워졌다. "그 여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수갑 풀어주시죠! 수갑 풀어! 풀라고!" 찬혁은 자신이 저지른 짓의 심각성을 이제야 절감한 듯 보였다. 경찰차에 떠밀려 넣어지면서도 아영을 돌아보려 기를 쓰고 버텼다. 수갑을 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길길이 날뛰었다. "신아영 씨. 사기 협박죄로 고발됐습니다." "예? 사기 협박이요?" 아영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처럼 죄목이 너무나 생소해서 멍청한 얼굴로 경찰관을 쳐다보았다. 경찰차에 태워 지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아영에겐 이 상황이 사기고 협박이었다. 기가 막혔다. 강남 경찰서의 밤 풍경은 살벌했다. 피 묻은 옷이 트렌드 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너도나도 피가 튄 옷을 걸치고 유치장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그 속에 찬혁도 끼어있었다. 형사 앞으로 이끌리는 아영을 돌아보며 그가 소리쳤다. "아영아! 아무 말도 하지 마! 알겠어? 변호사 올 거야! 걱정하지마 알겠지! 대답해! 신아영!" 아영은 유치장 안으로 떠밀려 들어가는 찬혁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결연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니.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도 입을 다물라고? 결백을 증명할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했다. 결백하니까. 억울하니까. 아영이 형사 앞에 앉혀졌다. "신아영 씨." "네..." "아영 씨!"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민 대표가 들이닥쳤다. 화들짝 돌아본 아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하필 여기를! "아영 씨 괜찮아요?" "네..." 민망함에 아영의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피의자 신분으로 형사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꼴이 수치스러워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수고하십니다. 민영환이라고 합니다." 민 대표가 명함을 꺼내 형사에게 건넸다. 형사는 흥미롭다는 듯 명함을 앞뒤로 돌려 보았다. 경찰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차분하고 여유로운 몸짓이었다. 명함의 위력을 전혀 체감하지 않는 자세였다. "앉으시죠. 신아영 씨와는 어떤 관계 시죠?" "보호잡니다." 아영이 민 대표를 홱 돌아보았다. 할 말을 잃었는데 입이 벌어졌다. 벌어진 입으로 뭐라 한마디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입술을 달싹 하려는 찰나 형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보호자요? 신아영 씨 미혼 아닙니까? 결혼한 사이 맞아요?" "아니요..." "동거인입니다." 민 대표의 대답에 기가 막혀 아영의 입이 대책 없이 벌어졌다. 겨우 주먹으로 틀어막아 아영은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아직 트렁크가 민 대표 집에 있다. 갑작스럽게 하룻밤 지게 된 신세가 여기까지 이어질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동거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려면 얘기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나. 눈앞이 아득해졌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심문은 이어졌다. "동거인이요? 신아영 씨. 동거인 맞아요?" "그게... " "대단하신 분과 동거 중이신 분이 왜 그런 짓을 했습니까?" "그만하시죠. 피해자 측과 합의가 이루어진 사안입니다." 아영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졌다. 민 대표를 홱 돌아보았다. 항의와 이의의 몸짓이었다. 사기 협박 혐의보다 더 황당한 소리였다. 합의라니? 죄를 인정하라고? 누구 맘대로? 독단적인 민 대표의 일 처리에 아영의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전에 없이 냉정하고 사무적이었다. 들썩 돌아앉은 아영을 돌아봐 주지도 않았다. "대표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왜.." "잠자코 있어요. 끝나고 나가서 얘기합시다. 김 변호사." "네. 대표님." 민 대표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가죽 케이스에서 서류를 꺼내 형사 앞에 내려놓았다. 형사는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는 책상 위에 턱 던졌다. "합의 쉽지 않았을 건데? 용케 받으셨네. 신아영 씨. 오늘 보호자분 덕분에 운 좋은 줄 아셔야 해요. 이 사람들 걸리면 끝이거든요? 유명합니다. 아주. 그럼 두 분 이만 가보세요." 아영이 고개를 희미하게 꾸벅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 대표는 말이 없었다. 경찰서를 나가며 아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찬혁이 아직 유치장에 있었다. 이대로 말도 없이, 설명도 없이 가버리면 찬혁이 미쳐 날뛸 것이다. 그러나 그녀도 뭐가 뭔지 감조차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알고 민 대표가 여기까지 온 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주춤대는 아영을 돌아보며 민 대표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찬혁이 걱정이라면 안 해도 돼요. 알아서 잘 처리 할 겁니다. 우린 가면서 얘기 좀 하죠." "......" 민 대표가 앞서서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찬혁이 여기 있는 것을 안다면 이미 다 알고 왔다는 뜻이었다. 이래저래 대화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민 대표 집 현관에 두고 온 트렁크도 찾아야 했다. 아영은 그를 따라갔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민 대표는 무겁게 침묵을 지켰다. 아영도 침묵에 동조했다. 할 말을 먼저 머릿속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야 했다. 꺼내야 할 첫 마디는 신중해야 했다. 감사. 항의. 사죄. 먼저 도리를 지키기로 했다. 어렵사리 입을 뗐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윤명숙 여사 전화 받았습니다. 임 노아 모친 되시죠. 새천년 미래한국당 당 대표 임 요한 의원 아들입니다." 순간 아영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문 교수에게 들은 거라곤 노아의 행실과 전적이 대부분이었다. 부모의 이력까지 듣기엔 그 당시 아영은 바쁘고 다급했다. 대단한 사람들인 줄은 알았다. 이정도 거물급 인사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상대하려고 벼르던 적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패한 싸움이었다. 그냥 참패도 아니고 매장의 수순이 예고된. 그럼 찬혁은! 아영의 심장이 무섭게 철렁 내려앉았다. "그분이 왜 대표님께 연락하신 건가요? 대표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요?" 민 대표가 아영을 돌아보았다. 이의를 제기하려 만반의 준비를 한 아영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단호하고 냉정했다. "정말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일로 빚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아영 씨 곧 우리 갤러리에서 정기 특별전 앞둔 거 잊었습니까? 인터뷰도 다 끝났고 각종 매체를 통해 광고도 다 나갔고. 각계각층 인사 앞으로 초대장도 다 발송했습니다. 윤 여사는 우리 갤러리 후원회 회원 중에서도 VIP 회원이에요. 그런 사람이 가만있지 않겠죠. 특별전 초대 아티스트가 아들 과외 하러 와서 돈을 요구하며 협박을 한다면요. 내일 9시 뉴스에 우리 갤러리 내보낼 생각이었습니까?" 참담했다. 특별전 초대 아티스트가 과외 하러 와서 사기 치고 협박했다는 대목에선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사기 협박은 거짓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과외... 소개를 받았고 만나러 갔습니다. 사기가 아닙니다. 증명해줄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끝난 일이에요. 협박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합의를 해버리면 제 명예는 뭐가 되죠? 인정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왜 찍었죠? 왜 윤 여사한테 보냈습니까. 굳이 나이트 안에까지 들어가서 노아를 만난 이유가 돈 때문이라고 했다면서 인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믿겠어요?" 술잔이 날아와 깨지는 통에 놀라 전송을 눌러버렸나 보다. 낭패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유가 명확했다. "사진! 그건 수업 취소 사유를 남기기 위한 거였어요! 보낼 생각이 아니었어요. 겁만 주려던 거예요!" "겁이라고 했습니까? 지금? 하아..." 민 대표의 한숨은 아영을 절망하게 했다. 민대표 조차도 어찌해볼 수 없는 적에게 겁을 주겠다는 여자가 얼마나 한심하기 짝이 없을까. 아영의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좌절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아영 씨 결백 믿어요. 억울한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습니다. 문동욱 교수와 통화 했어요. 경고했다던데. 알면서 그런 무모한 짓을 해버리면 어쩝니까." 치가 떨리는 상황에도 아영은 오직 찬혁이 걱정스러웠다. 목포 호텔 사태로 여론에 뭇매를 맞고 있는 파라다이스 그룹이었다. 상대의 무소불위 권력을 생각할 때, 이번 폭행 건까지 터져 버리면 대표로서의 찬혁의 입지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아영은 두려웠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찬혁이가... 그 자리에 있었기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습니다. 찬혁이까지 연루가 됐을 줄은 몰랐네요." "......" "찬혁이네 호텔도 이번 IBC 호텔컨벤션센터 사업자 선정 입찰에 참여한 거로 알고 있는데, 유력 후보 같던데. 불이익이 가지 않아야 할 텐데..." "사업자 선정 입찰이요?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죠? 무슨 연관이라도 있나요?" "임요한 의원의 입김이 지대하게 작용하는 사업입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죠. 모르는 척 쉬쉬할 뿐이에요. 권력의 힘이죠. 내가 보호자를 자처하면서까지 나서서 합의한 이유가 이번 일을 없던 일로 무마시켜서 아영 씨를 보호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찬혁이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파라다이스 그룹의 사활이 걸린 너무 큰 사업이라. 그러니 아영 씨도 앞으로는 찬혁이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예요. 둘이 한통속으로 엮이지 않도록. 그럼 찬혁이는 단순 폭행으로 처리할 겁니다." 아영은 완전히 무력해져 버렸다. 한 걸음도 허락하지 못하고 찬혁과 더 멀어지고 있었다. 숨겨야 할 비밀도 가슴에 품은 진심도 지금 이 사태 앞에선 사막의 모래알만큼이나 하찮게 여겨졌다. "내가 아영 씨의 보호자를 자청하고 합의를 종용하고 나선 이상, 저쪽에선 의혹의 시선으로 지켜볼 게 분명해요.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본때를 보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갤러리도 막대한 손해를 피해가긴 힘들어요. 그런 일. 걱정 안 해도 되겠죠." "... 그런 일 일어나지 않도록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민 대표의 마지막 말은 아영의 무너진 멘탈이 더는 일어날 수 없게 쐐기를 박았다. "정기 특별전이 끝날 때까지는 동거인 상태를 유지합시다. 갤러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줄 수 있겠죠. 아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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