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춤 물러서던 아영이 달려가 위태롭게 넘어가려는 민 대표를 부축했다.
"어머! 대표님! 왜 이러세요? 괜찮으세요? 여기 좀 앉아보세요!”
아영은 묵직하게 기대오는 민 대표를 응접실 소파에 풀썩 앉혔다.
“물 한잔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요.”
돌아서던 아영이 우뚝 그 자리에 세워졌다. 민 대표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어 소파에 나란히 푹 앉혔다.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쑥 물리고 벌떡 일어섰다. 민 대표의 이런 모습도, 이런 행동도 처음이라 그녀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무단결근의 여파라고 하기엔 그의 무례한 태도가 너무나 비이성적이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그의 이면의 모습에 아영의 대처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표님. 어디가 편찮으세요? 매니저에게 말해 김 박사님께 연락해드릴까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하우스매니저 곧 올라올 거예요."
“아영 씨."
"네."
"사람을 이 꼴로 만든 사람이 하는 소리 치곤 지나치게 호의적이네. 눈물 나게.”
무단결근이 대형 참사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면, 후 폭풍이라도 몰고 왔단 말인가. 하루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에 천재지변이라도 겪은 사람처럼 구는 민 대표의 반응에 아영의 심장이 무섭게 철렁 내려앉았다.
“어제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제가 없는 동안 전시회 준비에 차질이라도 생겼나요?”
“그게 걱정되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칩니까?”
"뒤통수라니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는 대표님께서 이러시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 아!"
늘어져 있던 민 대표가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벌떡 튀어 올라 아영에게 달려들었다. 뒷걸음질 칠 틈도 없이 양어깨를 낚아 채여, 아영이 맞은편 소파에 던져졌다.
"아! 대표님! 왜 이러세요!"
"하... 감히.. 내 앞에 꼿꼿이 서서 내려다보지 마. 거기 앉아서 내 말 잘 들어. 꿇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 하..."
도로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민 대표가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났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그의 과격한 행동도 경악스러움 그 자체였지만, 분노 때문이라고 하기엔 호흡이 너무나 거칠고 불규칙했다. 곧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헐떡였다. 아영은 놀란 가슴을 움켜쥐고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자신의 결근이 뭔가 큰 문제를 일으킨 게 분명하다는 두려움과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만회하기 불가능한 수준임에 틀림 없다는 암담함이 엄습해왔다. 아영은 공포감에 몸서리를 쳤다.
"둘이 뭐라고 결론 내리고 왔습니까. 기어이 나까지 망하는 꼴을 보겠다고 하던가?"
"무슨 말씀이신지 제발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해주세요."
"임요한 의원. 호출받았습니다. 이래도 몰라요? 계속 시치미 뗄 건가?"
"임 요한 의원이라면. 그분이 왜요? 노아 측에서 왜 갑자기 대표님을 찾는 거죠?"
민 대표가 잠시 말없이 아영을 응시했다.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소리라는 듯한 표정도, 결백을 주장하는 절박한 눈빛도, 겁에 질려 떨리는 음성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박찬혁이 혼자 설치고 있다는 뜻인데. 민 대표의 충혈된 눈이 가늘어졌다. 미간이 진지하게 모였다.
'이 여자를 더는 붙잡아 둘 수 없도록 나를 완전히 무장해제 시키겠다?'
문제는 찬혁이 칼을 빼 들었다는 것이다. 빼든 이상 휘두를 것이다. 찬혁이다. 섣부른 행동으로 화를 앞당기지 않기로 했다. 민 대표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정말 모르나 보군. 몰랐다면 미안해요. 충격과 배신감에 그만. 내 행동 사과하죠. 미안해요."
"그보다 왜, 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대표님께서 이러실 만큼 대체 뭐가 그렇게 충격이고 배신이었다는 거죠?"
"어제 아영 씨한테 전화했을 때 찬혁이 받더군요. 아영 씨가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그리 알라고 하길래 그냥 웃어넘겼습니다. 찬혁이가 충동조절장애를 겪고 있는 거, 어제오늘 안 사실도 아니고."
"......"
찬혁이 제 전화를 대신 받아 민 대표에게 뭐라고 했을지, 아영은 굳이 민 대표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짐작하고도 남았다. 전혀 곱지 않았을 찬혁의 무차별 언어폭력에 영혼이 초토화되었을 민 대표가 뇌리를 스쳤다. 아영은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그냥 웃어넘기려고 했는데, 임요한 의원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말했죠. 우리 갤러리 VIP 회원이라고. 연간 수억 원의 후원금을 갤러리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쾌척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없어서도 안 되고, 등을 돌리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특별 관리 회원이란 소립니다. 그런 사람한테 찬혁이 선전포고를 했어요. 시한폭탄을 던졌단 말입니다. 폭발 일보 직전의 핵폭탄을."
"예? 그게 무슨... 대체 왜요? 뭣 때문에요?"
아영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아시스 나이트클럽 낙원 유혈사태는 찬혁이 저와 얽히지 않고, 각기 다른 개별 사건으로 마무리된 일이었다. 그런데 찬혁이 인제 와서 선전포고를 했다니. 설마. 사기 협박범 오명을 씻어주겠다고? 찬혁의 우쭐한 한마디가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나 아니면 누가 널 챙겨. 안 그래?
안 그랬다. 절대 그러면 안 됐다. 찬혁이 기어이 제 목에 걸린 올가미를 스스로 조이려 하고 있다. 아영의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찬혁과 통화를 해야 했다. 어떻게든 그만두게 해야 했다.
"저. 잠시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사태가 악화하지 않도록 막아보겠습니다. 잠시만요."
"찬혁이 몰라요? 겪어봐서 알 텐데. 소용없는 짓입니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선전포고 내용이 노아의 마약 밀반입 및 유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증거로 아영 씨가 촬영한 사진이 이용됐다는 겁니다."
"예?"
"사진 속 정황. 사진 속 공범들. 증거. 증인. 모두 수집해서 보도 자료를 만들어 임요한 의원 앞으로 보냈더군요."
"......"
"내가 왜 임의원에게 불려갔는지 이제 알겠어요? 그거 터지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갑니까? 아영 씨 사기 협박 구속 막으려고 내가 아영 씨 보호자를 자처했습니다. 잊었어요? 그래 줬으면, 내가 그만큼 간곡히 부탁했으면, 전시회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좀 자중할 순 없었어요? 3년간 공들인 탑을 이런 식으로 허물 겁니까? 나까지 망쳐가면서?"
아영은 결국, 고개를 떨구고 입을 틀어막았다. 울음을 꾹꾹 씹어 삼켰다. 의도치 않아도 일은 꼭 터지고 만다. 늘 그랬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굴러갔고 또다시 그녀를 불행의 시작점에 세웠다. 아니, 이쯤 되자 아영은 의문스러웠다. 불행이 사람으로 태어나면 제 꼴을 하고 있지 않을는지.
***
파라다이스 정동진 리조트는 클럽 상그리아 대표 마틴 옝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안팎으로 분주하고 활기에 넘쳤다. 해외 리조트 협력사업의 전초기지로 정동진 리조트가 선택되었다는 자부심에 직원들은 전보다 의욕에 넘쳐 보였다. 양평 글램핑장에서 정동진으로 바로 이동해 손님맞이 준비 상황 시찰을 돌고, 세부 사항을 꼼꼼히 점검하느라 찬혁은 오전 내내 업무에 매여 있었다. 사장실로 돌아오자마자 수트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져 놓고 넥타이부터 끌어 내렸다. 그리고는 소파에 푹 눌러앉아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손으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
'아. 죽겠네. 신아영. 책임져. 자식아.'
양기를 다 빼앗겼다고 실현 불가능한 생트집을 지어내 엄한 사람한테 그 탓을 돌리는데도 입꼬리가 픽 휘는 건, 웃자마자 등골이 쌔 하게 흥분되는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신아영. 매우 해로운 놈인 건 분명했다. 늘어지는 찬혁을 보고, 김 실장이 바로 입을 열었다.
"사장님. 업무 보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미스터 옝이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 여유가 있습니다. 올라가셔서 좀 쉬십시오."
"쉬러 온 거 아닙니다. 지금 누우면 못 일어날 것도 같고. 산 아래 공사 현장 정리시켰습니까?"
"예. 미스터 옝이 머무는 동안은 모든 공사를 중단시켰습니다."
"잘했습니다. 아. 슬슬 배 고픈데, 밥 먹고 합시다."
"오시자마자 시찰하시느라 회장님 뵙지도 못하셨는데, 점심 식사는 회장님과 하시도록 준비할까요."
"......”
“......”
"그렇게 해주시죠."
"예. 준비하겠습니다. 더 지시하실 일 없으시면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나가봐요."
김 실장이 나간 후 찬혁은 아예 넥타이를 벗겨 내고, 셔츠 목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다리를 턱 올리고 소파에 깊숙이 몸을 뉘었다. 팔을 머리 뒤에 받치고 등받이에 기대 벽에 걸린 아버지 사진을 멀거니 응시했다. 어머니가 미쳐 돌아가는 동안 밖으로 나돌던 아버지. 눈싸움이라도 벌이듯 그는 사진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밖으로 나돈 이유가 여자였고, 그 여자가 아영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몸이 보인 반응은 토악질이었다. 역겨운 인간들. 그날의 어린 분노가 결국 아영을 도망자로 만들었고, 아영의 부재는 찬혁에겐 지옥 그 자체였다. 어린 희생양들엔 너무도 가혹한 십 년의 형벌이었다. 그래서 볼 수 없었다. 모질게 외면했던 아버지였다.
그랬던 아버지가 지금, 당신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있다.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따져보지도 못했는데, 미안하다는 말도 못 들었는데, 이젠 물어도 아버지는 답해줄 수 없다. 하나뿐인 아들조차도 알아보지 못하니.
"젠장!"
찬혁은 벌떡 자세를 고쳐 앉는 것으로 상념을 날려버렸다. 소파 등받이에 걸친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아영의 연락을 확인했다.
"응? 뭐야. 왜 아직 감감 무속이지?"
지금쯤이면 아영이 스튜디오로 옮기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찬혁은 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재발신도 역시 받지 않았다.
"짐 푸느라 정신없나?"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 윤 비서. 스튜디오로 잘 모셨나? 혹시 옆에 있으면 바꿔 봐요."
"아. 사장님! 그게..."
"뭡니까. 이 짜증 나는 반응은?"
"아직 팬트하우스 밑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하우스매니저라는 사람이 내려와서 신아영 님이 오늘 파티에 참석하셔야 한다고, 못 가신다고 하셔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안 그래도 지금 막 사장님께 보고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뭐? 아 이런 씨. 거기서 대기해."
"예!"
찬혁은 민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역시 받지 않았다. 분노의 재발신으로 민 대표의 통화기록을 초토화했다. 창 앞을 미친놈처럼 서성이며 재발신을 다시 눌렀다. 민 대표는 끝내 전화를 거부했다.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며 종료된 화면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매가 성가신 꼴을 마주한 듯 씰룩 매섭게 치 뜨이고, 입매가 비릿하게 휘었다. 한 자 한 자 이 사이에서 짓이겨 뱉어냈다.
"민영환. 이 개새끼. 못 놓겠다 이거냐. 지금 나랑 해보자 이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