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야 뭐야

4239
차양 그늘이 깊게 드리운 테라스, 하얀 테이블 위에 정갈한 식사가 차려져 있고, 그 옆에 휠체어에 앉은 박 회장이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하고 뒤에 서서 찬혁은 그를 바라만 보았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이미 오래전에 밀어내고 지워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일말의 기대감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애써 부인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찬혁아 부르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순간 긴장이 됐으니까. "식사 준비됐습니다. 앉으시죠, 사장님." 김 실장이 자리를 뜨자, 박 회장의 식사 시중을 드는 비서 한 명만 남기고 모든 수행비서가 자리에서 물러갔다. 찬혁은 테라스로 나가 맞은편에 앉았다. 앞에 앉은 찬혁을 보고 박 회장이 환하게 웃었다. "날씨가 좋군요.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 실낱같은 기대가 날아가고, 동시에 찬혁은 식욕도 잃었다. 대충 먹고 빨리 일어설 요량으로 제 앞에 놓인 음식에만 집중했다. 대꾸도 없는 그가 궁금했는지 박 회장이 옆에 있는 비서를 돌아보았다. "귀한 손님이 오신다더니, 이분이 그분이신가요?" "아닙니다. 회장님. 앞에 계신 분은 박찬혁 사장님이세요. 박. 찬. 혁. 회장님 아드님이십니다. 귀한 손님은 잠시 후에.." "아버지." 옆에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줘도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비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박 회장이 찬혁을 돌아보았다. 아버지라는 단어도 생소한데,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 너무 낯설었는지, 그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자리 좀 비켜줘요." "예. 사장님." 괜스레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비서가 황급히 물러갔다. 찬혁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기대감이 묻어난 몸짓이었다. "접니다. 찬혁이요. 아버지 아들." "아들?" "예. 오토바이 사주면 공부 열심히 한다고 사기 친 놈이요. 기억 안 나세요? 두카티? 그거 안 사주면 집 나간다고 땡깡 부렸잖아요. 저더러 꼴통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공부는 안 하고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사고나 치고, 속만 썩여드리고." "오토바이를 탔어요? 아이고 큰일 날 뻔했군요. 부모님들이 걱정 꽤나 했겠어요." "......" 찬혁은 등받이에 등을 턱 기대고, 덧정 없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혹시나 했습니다. 평생 밖으로만 나돌길래 아들 얼굴도 기억 못 하면 어쩌나 어린 마음에 별 거지 같은 걱정을 다 했지 뭡니까. 그런데 이게 뭐야. 아버지. 아예 절 잊어버리셨네. 죄책감이 뭔지는 알아요? 미안하긴 했어요?" "......" "하. 다 지우고 참 편안하시겠습니다." 냅킨에 입을 닦아 테이블에 던져 놓고 찬혁은 일어섰다. 박 회장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조차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텅 빈 눈으로 올려다보며 그저 환하게 웃었다. "잘 가요. 언제 또 오실래요?" 아들은 까맣게 잊은 사람이 작별 인사는 잊지 않고 건넸다. 대답은 고사하고, 눈도 맞추지 않고 찬혁은 냉정히 자리를 떠났다. 현관을 나서려는데 비서가 달려 나왔다. "사장님." "뭐죠?" "회장님께서 사장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비서는 책처럼 보이는 두툼한 가죽 양장 다리어리를 찬혁에게 한 아름 건넸다. "아버지가요?" "예. 작년까지만 해도 가끔 기억이 돌아오실 때가 계셨는데, 그때마다 사장님 오시면 꼭 챙겨드리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요즘은 전혀 기억이 없으셔서..." 찬혁은 말없이 다이어리를 받아 들고 사장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내려놓고 한참을 노려보다 결국, 맨 위에 올려진, 가장 늙어 보이는 다이어리 첫 장을 펼쳤다. 찬혁은 홀린 듯 자리에 앉았다. 1978년, 그 여름으로 시작하는 비망록은 아버지의 일대기 중 큰 사건을 중심으로 중요 부분만 발췌해 간략히 기록한 메모 형식이었다. 세 권을 다 읽는데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턱 찬혁은 들고 있던 마지막 권을 나머지 다이어리 위에 던져 놓았다. 다이어리 가장자리가 세월과 손때를 덧입어 그 안의 내용이 한층 유구하고 장엄하게 다가왔다. 너무 멀고 아득한 서사 같았다. 신빙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허구처럼. "뭐야. 남매가 될 뻔했던 거야?" 아영의 어머니가 아버지가 일평생 사랑했던 첫사랑이었다는 사실도, 그에 앙심을 품고 어머니가 아영의 일가에 저지른 악행도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반전이라 현실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화당을 부도까지 몰고 가다니! 그것도 모자라 로얄 호텔 김 여사를 사주해? 아영을 떼어내겠다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한테서 그 대가로 경주 콘도를 날름했다 이거지. "채리나. 네가 그거 믿고 까불었구나. 차아." 단란한 한 가정을 산산이 부숴버린 어머니의 광기가 소름 끼쳤다. 기가 막혀 헛웃음만 터졌다. 그동안 피해자 행세를 한 꼴이 되어 버렸다. 최대의 피해자는 다름 아닌 아영이었다. IMF 때조차도 호황을 누리던 경주 콘도를 매각해 신화당 부도를 막으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다. 파라다이스 호텔 3층 신화당 자리는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영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사죄의 의미였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호텔 명당자리에 알박기해놨다고 아영을 쥐잡듯이 몰아버렸다. 뒤통수를 강타당한 충격이었다. 의자에 맥없이 늘어져 있던 찬혁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냈다. 아영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후다닥 등을 곧추세우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까는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대화 중이었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고. 결론부터 말할게. 노아 일. 그러지 말아줘. 부탁이야. 정기특별전 끝날 때까지는 더 이상의 잡음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래서도 안 되고. 책임지고 전시회 조용히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내가 하는 대로 그냥 지켜봐 줘. 윤 비서님 그만 가시라고 해. 가시라고 해도 아직 밑에 계시네. 출장 일 잘 보고, 조심하고.] "잡음이라. 민영환. 자꾸 헛소리 지껄여서 잡음 넣고 있지 지금." 똑 똑 똑 "사장님. 미스터 옝 곧 도착하십니다." "갑시다." 찬혁은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밀어 넣고 사장실을 나갔다. *** 한빛 갤러리 앞에 차가 서자 대기하고 있던 갤러리 직원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대표님.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아영 씨. 갈까요." "예." 민 대표는 차에서 내려 뒤따라 나오는 아영의 드레스 자락을 잡아 주며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스치기만 해도 올이 홀홀 풀릴 것 같은 실크 드레스도 문제지만 빌딩 위에 까치발로 세워 놓은 것 같은 하이힐은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발끝으로 곤두박질치는 온몸의 무게를 발가락 열 개로 가까스로 버티고 섰다. 민 대표가 자연스럽게 아영에게 팔을 내밀었다. "잡고 걸어요. 구두 때문에 많이 힘들어 보이네." "감사합니다." "오늘 함께 와줘서 고마워요.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랬어도 이해했을 겁니다. 내가 한 짓도 있고." "아닙니다. 갤러리 일이고, 또 곧 있을 전시회를 위해서도 오는 게 당연하죠." "그래요. 곧 아영 씨 후원인이 될 사람들이니, 미리 인사해두는 것도 나쁠 건 없죠. 전시회 전에 후원인이 많이 생기면 갤러리로선 고마운 거고. 오늘 잘해봅시다." "네..." 뭘 잘해보자는 건지 아영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작품 활동에 매진해서 갤러리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 그림을 그려내는 것만 하라고 시켜도 머리카락이 술술 빠질 만큼 부담스러운데. 먹는 족족 스트레스를 연소시키는데 모든 열량을 소진하느라 피골이 상접할 지경인데. 후원인을 끌어모으라니. 무슨 약장수도 아니고. 예술 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온 자존심이 재화 벌이라는 현실적인 당면과제 앞에서 딜레마에 빠져 버렸다. 미술을 선택한 순간 이미 예견된 미래였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자 리나가 두 팔 벌려 환영의 제스처를 과장하며 다가왔다. 그새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리나는 오늘도 감쪽같이 모르쇠 연기를 펼쳤다. "선배! 신 작가님! 어서 오세요! 두 분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채 대표. 준비하느라 수고가 많았겠는데. 역시 스케일 큰 거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제일 갤러리에 비하면 이건 새 발의 피죠. 뭐. 신 작가님. 못 뵐 줄 알았는데, 오셨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네. 덕분에요. 초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까지 빳빳이 들고 아영이 당당했다. 그녀의 호기에 소스라친 건 리나만이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배짱을 부리는 제 모습이 낯설어 아영도 순간 흠칫했다. 그런데 그 믿는 구석이 조금 많이 삐딱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범주에 집어넣을 수 없다는 게, 그 비정상이 이렇게나 뿌듯할 수가. 모를 리 없는 리나가 알아서 자리를 먼저 피했다. "두 분 위층으로 올라가세요. 곧 행사 시작해요. 어머! 문 여사님! 어서 오세요!." "우린 올라가죠." "네." 이 층 연회장은 이미 귀빈들로 붐비고 있었다. 피아노 선율 고상하게 흐르는 홀에 예복 수트와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손에 샴페인 잔을 하나씩 들고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민 대표는 아영을 데리고 그룹에서 그룹으로 이동하며 그녀를 소개하는데 열을 올렸다. "아. 이분이 바로 제일 갤러리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신예 작가군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어느 대학에서 어떤 분야를 전공하셨나요?" "서울문화예술대학 회화과 전공입니다." "서울문화예술대학이면 국내에선 꽤 알아주는 대학이죠? 국내 아티스트 중에 그 대학 출신이 누가 있나?" "많이 계시지만 대표적으로 김 율 화백이 워낙 유명하죠.” "유학도 물론 다녀오셨겠죠? 파리? 뉴욕? 저도 뉴욕에서 공부했거든요." "아. 아뇨..." "유학파 아니고? 이야. 순수 국내파신데 제일 갤러리가 점 찍을 정도면 실력이 정말 대단하신가 보네요!" "아. 아닙니다..." "아영 씨. 마실 것 좀 가져올게요. 대화 나눠요." "네? 저 혼자 여기서요? 아 저기..." 학력 인증을 실력 인증의 척도라고 올곧게 믿는 사람들 사이에 쩔쩔매는 아영을 홀로 두고 민 대표가 눈까지 찡긋 해 보이고는 가버렸다. 그 눈 찡긋이 민 대표의 잘해보자던 말과 오버랩 되는 건 기분 탓일까. 아영은 당황스러웠다. "어머. 윤 여사님. 안녕하세요. 노아는 좀 괜찮아요?" 허! 아영의 등골이 순간 오싹해졌다. 맞은 편에 선 여자가 등 뒤의 여자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찬혁이 던진 시한폭탄에 다른 것도 아닌 제가 찍은 사진이 포함되었다고 했다. 아니, 그 사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했다. 무리로 다가오며 인사에 화답하는 목소리는 전화 통화 속 청담동 사모님의 고상한 억양 그대로였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등 뒤의 인물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몰리느라 잠시 어수선해진 틈을 타 아영은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나마 민 대표가 윤 여사로부터 아영을 보호해줄 유일한 방패였지만, 그는 바에 붙어 서서 사람들과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혼자 두리번대던 아영이 저 멀리서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리나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돌아서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화장실로라도 잠깐 피신해야 할 것 같았다. 노아 측 사람을 만날 배짱은 아직 없었다.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조금이라도 멀리 피신하기 위해 아영은 일 층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계단을 급히 내려가려는데 구두가 말썽이다. 다다다다 내려가려는 마음과 달리 구둣발이 또각또각 허둥댔다. "어머!" 기어이 한쪽 구두가 벗겨지고 말았다. 외 발로 하이힐 위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대는 아슬아슬한 순간,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 날아왔다. "신데렐라야 뭐야." 가까스로 난간에 매달려 계단 위를 흘겨보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찬혁이 삐딱하게 서 있었다.
신규 회원 꿀혜택 드림
스캔하여 APP 다운로드하기
Facebookexpand_more
  • author-avatar
    작가
  • chap_list목록
  • like선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