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찬혁이 온 거 봤어요?"
칵테일 두 잔을 앞에 받아 놓고도, 민 대표는 위스키 스트레이트 먼저 쭉 들이켰다. 아쉬운지 위스키 잔을 공굴리다 탁 내려놓고, 리나를 돌아 보았다.
"음. 그래?"
"신 작가 방금 나가서 찬혁이 만나는 것 같던데. 선배, 신 작가한테 공들인다던 거, 그거 그냥 순수한 작가 욕심이었어요? 난 아닌 줄 알았는데? 두 사람 저래도 선배 괜찮아요?"
"소꿉친구들 소꿉놀이하는 거 훼방 놓을 만큼 옹졸한 사람은 아닌데."
민 대표는 무감한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지어냈다. 찬혁은 그 특유의 오만한 시선으로 기선을 제압해버리고, 두 눈 뻔히 뜨고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아영의 뒤를 쫓아 나가는 도발을 시전했다. 짓이겨진 자존심을 무심한 표정 뒤에 감추고 어금니를 질끈 물어대느라 턱관절이 다 얼얼했다. 흔들리는 멘탈을 악무느라 턱이 다 나갈 지경이었다. 하는 수 없이 위스키를 입속에 털어 넣어야 했다. 이쯤 되자 민 대표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리나의 리액션이 못마땅해졌다.
"그러는 너야말로 어떤데. 네가 괜찮을 리는 없을 테고. 이젠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거니. 평생 찬혁이 지킨다고 공들인 걸 생각하면 너야말로 의왼데? 여자라면 동창생들조차도 찬혁이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할 땐 언제고."
"찬혁이 잘 알잖아요. 애초에 태생이 야생인걸. 누가 못 채가게 지킨다고 지켜질 사람인가. 그동안은 찬혁이를 길들일만한 호적수가 없었을 뿐이고."
"아영 씨가 맹수 조련사라도 된다는 투다? 물러나겠단 소리로 들리네. 너답지 않게."
"타이밍 보는 중이에요."
"타이밍이라. 물러날 타이밍은 아니겠지. 설마."
"아픈데 자꾸 찌를 거예요. 선배? 조력자가 있으면 또 모를까. 미녀와 야수도 아니고, 저 두 사람을 저 혼자 무슨 수로 떼어놓겠어요. 안 그래요?"
리나는 한숨을 그럴듯하게 몰아쉬는 타이밍도 놓치지 않았다. 이만하면 억지로 못 본 체하고 있는 민 대표의 딱한 인내심에도 불똥이 튀었을 테니. 진짜 불구경은 이제 시작인 거고.
민 대표는 앞에 받아 둔 칵테일 중 한잔을 리나 앞으로 슥 밀었다. 리나가 잔을 들었다. 두 개의 잔이 부딪쳐 영롱한 소리를 냈다. 때론 말이 필요 없는 의사 결정의 순간도 있다.
"잘 마실게요. 선배. 전 윤 여사님 좀 봬야겠어요. 노아는 좀 어떤지. 이 업계에서는 말 그대로 큰손인데, 이참에 예쁘게 보여봐야죠. 가볼게요."
민 대표는 아영을 위해 칵테일 한잔을 새로 주문해놓고, 남은 잔을 쭉 비웠다.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애써봐도 속에서 열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생전 처음 남 앞에서 누군가에 대한 속내를 드러냈었다. 사심이 있어서 공을 들였는지, 공을 들이다 보니 작가 욕심이 사심으로 변질한 것인지, 순서가 모호해졌다. 후일을 대비해 순서를 반드시 따져놔야 하는 민 대표 특유의 철저한 사후관리 담당 전두엽 시스템을 망가뜨린 장본인이 신아영이었다. 그런 여자는 아영이 처음이라, 처음이라는 그 생경한 감흥을 불러일으킨 여자에게 미친 듯 끌려가 버렸다. 마치 스펀지에 물 스미듯, 아영이 젖어 들었다. 묵직하고 축축하게.
그런 민 대표에게 찬혁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난관에 봉착한 게 아니라 아예 차단막에 가로막힌 갑갑함이었다. 3년 동안 쌓아 올린 공든 탑을 가차 없이 깨부수고 하룻밤 새에 만리장성을 올린 놈이 박찬혁이었다. 저절로 속에서 놈 소리가 터지고, 상스러움에 오염이라도 된 것처럼 민 대표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런 놈 면상을 어떻게 깨겠어. 뒤통수를 쳐야지."
놈 서리도 처음이 어려웠지 두 번째는 할만했다. 놈 소리가 찰져진 것도 같았다. 별거에 다 희열이 올라왔다. 민 대표는 비릿하게 입가를 올렸다.
***
아영은 한쪽 발에만 신은 하이힐 때문에 절뚝절뚝 계단을 되올라가야 했다. 정확히 세 칸 위, 계단 끝에 장렬히 누워있는 구두를 턱 주워들고 겨우 내려온 계단을 도로 올라갔다. 훅 내쉰 날숨에 앞머리가 팩 날렸다.
아영은 인정머리 없어 보일 만큼 하이힐을 찬혁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어딜 봐서 신데렐라야. 안 보여? 소가죽이거든!"
얼굴 앞에서 도발해대는 구두엔 아랑곳없이, 찬혁이 아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성질머리로 말하자면 구두를 낚아채 계단 아래로 집어 던져 놓고 주워 신으라고 할 위인이, 신발 들고 흔드는 사람 무안하게 애틋한 눈으로 쳐다 만 보고 있다. 머쓱해져, 아영이 구두를 신으려 주섬대는데, 그제야 회로에 불 들어온 사람처럼 그가 구두를 뺏어 들었다.
"어머! 지금 뭐 하는 거야!"
신겨주는 줄 알았다. 동화건 드라마건 보면 다들 그렇게 신기던데. 역시나 남다른 뇌 구조를 자랑하는 찬혁답게 신겨주기는커녕 나머지 한쪽 구두마저 벗겨버렸다.
"감당 안 되면 신지 마.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가."
"아! 가긴 어딜 가. 행사 시작했는데. 나 들어가 봐야 해!"
아영은 낚아챈 손을 뿌리치고 난간을 붙들었다. 찬혁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심장마비에 걸릴 대사건인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그가 불안해 계단 난간에 매달려 버텼다.
"사람들 보면 어쩌려고 그래. 여기 윤 여사님 와계셔. 노아 모친! 우리 이러는 거 보기라도 하면? 낙원 패거리 공인 시킬 일 있어?"
" 그러니까 가자고. 네 소원대로 숨자니까. 조용한데 가서 얘기해. 가 얼른."
듣고 보니 맞는 소리였다. 아영은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린 손을 놓고, 치마를 수북이 안아 들었다. 여전히 끌리는 치마를 잡아주는 호의를 베풀면서도 찬혁은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다리 짧은 거 실화냐. 차아."
혀까지 차대는 바람에, 더 그럴듯하게 들렸다. 아영은 발끈 쏘아붙이려고 벌린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출장은? 벌써 돌아온 거야?"
"출장 중이야."
"뭐? 일하다 온 거야? 어디 있었는데?"
"정동진."
"거기서 여기를? 그럼. 또 가야 하잖아."
"그러게 여길 왜 와서 사람 달려오게 만들어. 여길 왜 오냐고. 무슨 깡이지?"
"......"
"민 선배 집에서 나오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거기는 왜 또 눌러앉는 건데?"
"......"
찬혁은 대꾸 없이 아랫입술만 잘근대는 아영이 못마땅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입술을 물어대는 걸 보니 여기 올 수밖에 없었을 제 입장을, 눌러앉아야 했던 나름의 이유를 곱씹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있는 게 찬혁은 더 열이 뻗쳤다. 제발 시키는 대로 좀 해주지. 제 뒤에 숨어서 나 몰라라 좀 하지. 기어이 저를 보호하겠다고 되지도 않은 고집을 부리고 있는 아영이 답답해 속에서 천 불이 올라왔다.
찬혁은 불 꺼진 일 층 복도 끝에서 사무실인 듯 보이는 곳 문손잡이를 쥐고 철컥 돌렸다.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심기 불편한 거 시위하듯 아영의 손을 홱 뿌렸다. 딸려 들어와 던져진 채로 아영이 저 앞까지 날아갔다.
"말도 더럽게 안 듣지!"
충동조절장애가 있다는 게 사실이기라도 한 건지, 찬혁의 흥분지수가 상승하고 있는 게 감지되었다. 숨까지 씩씩대고 서서 매섭게 노려보는 찬혁은 조금 전 계단 위에서 애잔한 눈길을 보내던 그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안면을 바꾸고 행여나 강제로라도 제 뜻을 관철하려 할까 봐 아영은 두려워졌다.
"말했잖아. 전시회 끝날 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이건 노아 사건과 상관없이 이미 그전부터 내가 책임지고 끝내야 할 과제였어. 약속이고 합의였다고. 공적인 일. 중도 하차가 불가능한 일이야."
"누가 하지 말래? 그 집에서 나오기만 하면 전시회 끝날 때까지 너 하는 데로 두겠다고 했어. 안 했어. 어?"
꼭 이런 식이다. 주관식 답을 할 틈을 안 주지. 아영은 한 번 더 입술을 물었다.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여? 노아 사건. 보도자료까지 만들어서 보냈다며. 그것도 내 사진 이용해서 증인 모으고! 그것 때문에 대표님이 임의원 호출받았어. 그 충격으로 다 죽어갈 것처럼 휘청대는 사람한테 안녕히 계세요. 하고 나오라고? 나 때문에 쓰러진 사람한테? 어떻게 그래? 나올 때 나오더라도 사람이 그러면 안 되잖아. 도리가 아니지."
"그놈에 도리! 돌아버리겠네! 진짜! 사진은 뭔 소리야. 네 사진? 민 대표가 그러디? 내가 네 사진 무단 도용했다고? 넌 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나한테 확인 전화도 없이?"
"아냐? 그럼 사진은…."
"차아."
헛소리를 지껄여 잡음만 넣은 줄 알았더니, 민 대표는 멋들어진 연기력으로 상대의 약점을 제대로 공략했다.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졌다. 할리우드 액션에 껌뻑 넘어간 아영의 순진함은 더 기가 찼다. 그놈에 도리가 뭔지,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그렇게 도리를 부르짖더니, 이제 와 새파랗게 질린 꼴이라니. 찬혁은 성큼 다가가, 무슨 음모에라도 걸려든 사람처럼 혼란스러운 얼굴로 겁에 질려있는 아영을 품에 안았다.
화가 안 풀린 뒤끝이라 그랬는지, 남 생각 먼저 하느라 늘 전전긍긍해대는 여자가 답답해서 그랬는지, 그 모든 감정을 짓이겨버리는 야만의 충동 때문이었는지, 그는 아영을 으스러지게 안았다.
"옷이 이게 뭐냐. 확 벗겨버리고 싶게."
"옷이 뭐 어 ㄸ...ㅐ...ㅅ..ㅓ..."
듣기 싫은 소리를 지껄이는 아영의 입을 물어버렸다. 계단에서 돌아선 순간 꼴사납기만 하던 빨간 립스틱도 모조리 빨아 먹었다. 이 사이에서 말캉말캉 탄력을 발하는 오동통한 입술 때문에 온몸의 신경세포가 합심해 전압을 끌어올렸다. 아 씨. 신아영. 이러려고 달려온 건 아니었다. 돌겠네. 다리 사이가 터질 것 같았다. 찬혁은 아영을 거머쥐다시피 끌어안고 등을 훑었다.
꼴 보기 싫다더니, 진짜로 벗기기라도 하려는 거야? 지퍼를 찾는지, 찬혁의 손이 등 위를 정신없이 헤맸다. 아영은 행여라도 겨드랑이 아래에 있는 지퍼를 들킬세라 몸을 틀며 엉덩이를 뒤로 쑥 물렸다. 소용없었다. 오히려 엉덩이만 붙들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악에 받친 사람처럼 엉덩이를 움켜쥐고 찬혁이 입술을 돌려 무는 사이사이 신음처럼 말을 뱉어냈다.
"끝나고 짐 옮길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아영이 뭐라 웅얼대 보지만, 소리가 만들어지는 족족 그의 혀에 뭉뚱그려졌다. 쓸데없이 토라도 달까 봐 그는 혀를 물어 버리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아직 일정이 남아서 돌아가야 하는데. 짐 옮겨 놓고 또 날밤 새우게 생겼군. 오늘도 자기는 글렀고. 이 자식. 미치겠네! 진짜.
어쩌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은 이미 제 머릿속에 있는데도, 찬혁은 애걸복걸하는 심정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이 집요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기원을 알기에 찬혁은 두려워졌다.
덜컥 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