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아영이 먼저 잠에 곯아떨어졌다. 재워달라는 사람 앞에 두고 새근새근 잘도 잔다. 머리를 손으로 괴고 모로 누워, 잠든 그녀를 바라보며 찬혁이 어이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차아."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잔머리를 쓸어 넘기고, 손가락을 머리칼 사이에 밀어 넣어 쓰다듬는데도 그녀는 미동조차 없다. 살짝 실눈이라도 떠주면, 왜 자는 척하느냐고, 어디서 되지도 않은 꼼수를 쓰냐고 억지를 부려서라도 다시 한번 밀고 들어가려는데. 자다가 영구박제라도 당한 사람처럼 그녀는 인사불성이다.
찬혁은 쓸어 넘긴 머리칼 아래 드러난 그녀의 귀를, 작고 통통한 귓불을 살살 조물거렸다. 그녀의 입술만큼이나 말캉말캉한 게 묘한 심상을 불러일으켰다. 손톱보다 작은 살점에 야릇하게 동해, 발정 난 개처럼 저 혼자 또 일어선다. 가관이다.
"멀쩡한 사람 변태 새끼 만들어 놓고 잠이 오지. 아. 이 자식 진짜. 미치겠네."
귓바퀴를 돌아 내려오며 자잘한 키스를 남겼다. 잇새에 감도는 저릿한 야만의 충동은 귓불을 잘근 물어 주는 것으로 겨우 달래 놓고, 못내 아쉬운 찬혁이 중얼댔다. 중 저음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갈라져 나왔다. 원색의 여운이 짙게 깔렸다.
"오늘만 봐주는 거야. 다음에도 먼저 잠들면 그땐 가만 안 둬."
달팽이관으로 쏟아부은 그의 후끈한 입김에 아영의 어깨가 움찔 움츠러드는가 싶더니 이내 나른하게 이완되었다.
방충망 처진 문으로 새벽 산바람이 서늘하게 불어 들었다. 땀으로 반들대던 그녀의 어깨도 등줄기도 금세 서늘하게 식었다. 찬혁은 얇은 실크 이불을 끌어다 그녀를 폭 덮어 그대로 품에 안고 누워 데크로 통하는 통유리 문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푸르스름하게 열리는 먼 하늘이, 검은 숲 위에 부옇게 피어오르는 새벽 안개가, 품에 안은 여자 때문일까. 신비를 넘어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고즈넉하여 더없이 사사로워지는 감흥이 가슴에 충만해질 즈음 찬혁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
띠링 띠링 띠링
"음..."
연이어 들어오는 메시지 알람 소리에 아영이 고개를 쳐들었다. 눈을 뜨려고 오만상을 모아 미간을 찡그렸다. 애를 써봐도 눈이 가까스로 게슴츠레 떠졌다. 반사적으로 옆자리를 훑는데, 온기 없이 서늘했다.
"찬혁아..."
목이 잠겨 목소리가 파삭파삭 부서져 나왔다. 대답이 없다. 아영은 그제야 몸을 움 척 일으켰다. 스르르 흘러내리는 실크 이불을 붙들어 가슴 앞에 움켜쥐고 통유리 너머로 데크를 살폈다. 햇살이 눈 부셨다.
"박찬혁."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산책 갔나?"
몸에 이불을 둘둘 감고 침대에서 내려와 물 먼저 들이켰다. 기어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자지러지게 터지는 숨을 어쩔 줄 몰라 입을 틀어막고 악착같이 집어삼켰지만, 찬혁은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비어져 나온 비명이 찬혁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간 순간, 찬혁은 폭주했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무리가 왔다.
띠링
아영은 식탁 위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찬혁의 메세지가 연이어 들어와 있었다.
[일어났어?]
[아픈 데는 없고?]
걱정을 해주는데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하룻밤 사이에 사람 초 죽음을 만들어 놓고 괜찮냐니. 병 주고 약 주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어이없어 메시지에 대고 하얗게 눈을 흘기면서도, 입매는 왜 흐뭇하게 휘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늘 출장 가. 준비할 게 있어서 먼저 왔다.]
[준비되는 데로 내려가. 윤 비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다시 말하지만, 가는 즉시 짐 들고나와. 윤 비서가 스튜디오로 데려다줄 거야. 네 입장 충분히 들었고, 네 상황이 어떤지도 알겠는데, 말 같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일단 나와. 호텔로도 일산 집으로도 들어오라 소리 안 해. 네 입장 충분히 고려해서 전시회 끝날 때까지만 너 하는 데로 내버려 둘 테니, 너도 시키는 대로 해. 알았으면 메시지 확인 즉시 대답해.]
아영은 침대 끝에 풀썩 걸터앉았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갤러리에 무단결근을 해놓고 민 대표에게 전화 한 통 해주지 않았다. 저에게 닥친 일련의 사태가 지극히 개인적이라 함구하는 건 둘째 치고라도, 연락은 해야 했다. 그간에 민 대표가 베풀어준 물심양면의 공을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됐다. 전에 없던 침묵으로 일관하는걸 보니, 민 대표가 단단히 벼르고 있는 모양이다.
아영은 욕실로 들어가 서둘러 샤워를 했다. 찬혁과의 관계가 명확해진 이상, 민 대표의 팬트하우스를 나와야 하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러나 팬트하우스를 나옴과 동시에 저와 민 대표에게 세간의 이목이 쏠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세간의 이목까지는 아니더라도 노아 측에서 촉각을 곤두세울 게 당연했다. 찬혁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는 이유다. 재계 두 거물 그룹 대표 사이에 끼어있는 모양새를 한 저 때문에 루머와 스캔들이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왕왕 일어날 게 분명했다. 그런 것까지 네가 왜 신경을 쓰냐고. 그것 때문에 집으로 못 들어온다는 건 무슨 개소리냐고 찬혁은 버럭 소리를 질러댔지만,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아영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보호자를 자처하면서까지 저를 구제하기 위해 애써준 민 대표였다. 전시회가 끝날 때까지 그에게도 갤러리에도 손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행히 찬혁이 한발 양보해주었다. 아영은 짐 먼저 옮기기로 했다. 그리고 갤러리로 가서 민 대표에게 양해를 구할 것이다. 수습 직도 정중히 사양할 참이다. 전시회 준비에만 전념하고 싶은 저의 뜻을 민 대표는 받아들여 줄 것이다. 정리가 끝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려갈 차비를 끝내고 찬혁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응. 출장 잘 다녀와.]
띠링
찬혁의 답이 바로 들어왔다.
[자지 말고 기다려.]
[응...]
***
도어락을 풀려는데 문이 열리고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민 대표 출근 후, 퇴근 전, 팬트하우스를 관리하는 매니저가 기겁하는 아영을 보고 재빠르게 다가왔다. 위장 전입 이후 두 번째 대면이었다.
"작가님. 일찍 들어오시네요! 놀라셨죠?"
"아. 예. 근데 무슨 일이예요?"
아영은 휘둥그레 뜬 눈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휘휘 돌아보았다. 등에 하얀 고딕체로 ‘STAFF’라고 쓰인 검은 티셔츠 차림의 남자들이 이 층에서 줄줄이 내려와 밖으로 나갔다.
"오늘 밤 파티 참석 준비를 위한 공간을 세팅하고 있습니다. 매년 디자이너만 부르곤 하셨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하라고 지시를 하시네요. 아무래도 특별한 날이지 싶어요."
"아. 예. 그럼 수고하세요. 전 볼일이 있어서 잠시 들어왔어요. 올라가 볼게요."
"네. 일 보세요, 작가님. 소란스러운 작업은 다 끝났습니다. 지금 대표님께서, 아. 잠시만요! 이봐요!"
매니저는 뭔가 말을 더하려다 말고, 인부들에게 지시할 게 있었는지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이 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아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응접실에 뷰티샵이 세팅되어 있었다. 누가 보면 뮤지컬 백스테이지 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자선 인의 밤. 리나가 주최하는 파티가 바로 오늘 밤이었다. 갤러리 정기 특별전 홍보를 위해서라도 함께 참석해주기를 어렵사리 부탁하던 민 대표였다. 그러나 이 층 상황은 업무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지나친 배려였다. 사고나 지병으로 병원에 드러눕는 게 아니면, 거절은 불가능해 보였다. 부담감이 밀려왔다.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고 있었다.
정리할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자주 쓰는 물건이 아니면 트렁크에서 아예 꺼내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가방을 싸는 데 고작 삼십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영은 트렁크를 아래층 현관 앞에 세워두고 다시 이 층으로 올라가 그동안 생활했던 공간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 또한 시간을 많이 할애할 필요가 없었다. 침대와 욕실. 둘러볼 건 그게 다였으니까.
아래층으로 내려와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11시를 조금 넘겼다. 짐을 옮겨 놓고 갤러리로 가면, 잘하면 점심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사과도 할 겸, 자선 인의 밤 행사 참석에 대해서도 정중히 거부 의사를 내비쳐 볼 겸, 민 대표와 식사라도 하면서 얘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팬트하우스 비상 키를 꺼내놓고 가려고 가방 안주머니를 열고 손을 밀어 넣었다.
"응?"
안주머니가 마치 속 깊은 자루라도 되는 것처럼 아영은 손을 깊숙이 찔러 넣고 속을 휘저었다
"어? 어디 갔지?"
비상 키를 주방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가방 안주머니를 이쪽저쪽 벌려가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뭐지?"
구석구석을 손으로 샅샅이 훑고 들여다보다가 급기야는 가방을 거꾸로 들고 내용물을 모조리 카운터 위에 쏟아부었다. 탈탈 먼지 나게 털었다. 가방을 뒤집었다. 없었다.
신박
도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팬트하우스 비상 키를 보관하느라 절대 열 일이 없는 안주머니였다. 그래서 도장도 거기에 넣어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왜 도장만 사라진 걸까. 잃어버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잖아, 하고 넘기려 해도 미련이 남아 아영은 이 층으로 다시 올라가 침실부터 이 잡듯 살피며 내려왔다.
"구매 물품을 여기 테이블에 쏟아 놓고 확인하고, 서재로 옮겼을 테니..."
주위를 두리번대다, 그럴 일 없을 텐데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영은 서재로 향했다. 가방 안주머니에 넣었다고 착각하는 건지도 모르니까. 비닐봉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가는 걸로. 비죽이 열려있는 서재 문을 조용히 열었다.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둘러볼 필요도 없이, 다행히 비닐봉지가 서재 책상 옆에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저절로 뒤꿈치가 들려 살금살금 재빨리 들어가 비닐봉지를 열어 보았다. 그날 이후 민 대표는 물건에 손도 안 댔는지, 찬혁이 냅킨에 둘둘 말아 쑤셔 넣은 실타래 캔디가 눅진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어머. 이걸 치우지도 않고 그대로 드렸네."
아영은 책상 위에서 티슈를 뽑아 흐물대는 설탕 덩어리를 둘둘 말아 휴지통에 버리고 나머지 비닐봉지도 순서대로 샅샅이 살폈다.
"뭐해요."
"허! 대표님!"
책상 옆에 쪼그리고 앉아 봉지 안을 들여다보던 아영이 갑자기 뒤에서 날아온 민 대표 목소리에 놀라 뒤로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빨리 확인하고 간다고 온 신경을 봉지 안에 몰두하느라 서재 안쪽 침실 문이 열리는 것도 몰랐지만, 갤러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방에서 나오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라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벌떡 일어나 어정쩡하게 인사를 해보지만, 무단결근 이후 첫 대면으로는 부적절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방에서 걸어 나오는 민 대표는 어딘가 많이 불편해 보였다. 아파서 결근이라도 한 건가. 처음 보는 흐트러진 모습도 충혈된 눈도 불안정한 걸음도 그답지 않았다.
"도둑고양이처럼 뭘 그렇게 뒤지고 있지? 뭐 찾아요. 뭘 찾는 거야? 뭘까. 뭐냐고."
흔들리는 걸음만큼이나 두서없는 소리를 되풀이하며 민 대표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