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백 2.6초. 오랜 잠에서 깨어난 흑 표범 한 마리가 마치 찬혁의 세포 하나하나와 합체라도 한 것처럼 야수로 돌변해 날아갔다. 2기통 엔진이 뿜어내는 특유의 거칠고 날카로운 배기 음이 새벽 안개 내려앉은 도시의 텅 빈 도로를 직선으로 뚫고 지나갔다.
"아 씨. 미치겠네!"
찬혁의 이 사이로 억눌린 욕이 비어져 나왔다. 시작부터 꺅꺅 죽을힘을 다해 질러대는 아영의 비명이, 겁에 질려 사정없이 둔부를 꽉꽉 조여대는 아영의 허벅지가 미친 속도감만큼이나 아드레날린을 폭발시켰다. 절제 불가의 쾌감과 극한의 인내 사이에서 흥분 수위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다.
왜 애새끼들이 하나같이 여자를 뒤에 태우지 못해 안달이었는지 찬혁은 이제야 그 묘미를 알게 되었다. 여자부터 안장에 보란 듯이 앉히는 놈들을 질주 본능이 뭔지도 모르는 사이비 폭주족 새끼들이라고 대놓고 비꼬았었다. 오토바이로 여자나 꼬셔대는 한심한 새끼들이라고, 오토바이에 대한 예의도 모르는 무뇌충 놈들이라고 개무시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개폼은 저 혼자 다 잡고 있었다.
허리를 두 동강을 낼 각오로 조여 오는 아영의 두 팔이, 엉덩이에 밀착된 그여의 하체가, 그리고 자지러지는 비명이, 아영의 그 모든 것이 제 통제하에 있다는 같잖은 우쭐함이 미친 질주의 쾌감을 배가시켰다. 기세를 몰아 곡예 하듯 멋들어지게 코너를 돌았다.
"아악!"
사정없이 쏠리는 몸을 죽을힘을 다해 찬혁의 몸에 밀착시켜봐도 소용이 없었다.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비명이 아영의 입에서 속절없이 터져 나왔다. 길게 늘어져 허벅지까지 푹 덮어준 라이더 재킷은 무용지물이었다. 유선형으로 매끈하게 잘 빠진 오토바이 헤드가 칼로 물 베듯 바람을 날카롭게 가르자 양옆으로 강풍이 급류처럼 모든 걸 쓸고 지나갔다. 속옷이 드러난 지 오래였다. 동그란 엉덩이 살이 찬 새벽공기에 새파랗게 질려 얼얼했다. 그 와중에도 양 허벅지는 죽지 않겠다는 집념에 불타 악어 주둥이처럼 찬혁의 하체를 악물었다. 이쯤 되자 아주 날 잡은 사람처럼 배기 통 팡팡 터뜨려가며 시공간을 날아가는 그가 괘씸해졌다. 십 년의 복수를 이따위로 하는 거야? 멈추기만 해봐! 귀싸대기를 그냥! 눈도 못 뜨고 이를 갈아대던 그때, 코너를 돌자마자 오토바이가 정자세로 반듯하게 직진했다. 속도감은 그대로 같은데 안정감이 현저히 높아진 느낌에 아영은 그제야 질끈 감은 눈을 치떴다.
어느덧 도심을 벗어나 교외를 달리고 있었다. 치고 나가는 오토바이의 속도감에 비해 저 멀리 지나가는 밤 풍경은 유속이 느린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갔다. 난생처음 맨몸으로 경험하는 이질적인 속도감이라 뻔한 눈앞의 현상이 너무나 신비로웠다. 두 눈이 경이로움을 목격한 상태 그대로 동그랗게 떠졌다. 찬혁의 등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강제로 엎드린 터라 아영은 눈만 겨우 굴려 가며 페이스 쉴드 너머를 살폈다. 눈을 굴릴 여유가 생기자 마침내 느껴졌다.
'아! 바람!'
공포에 질려 헐떡대느라 폐에 공기가 차 가슴이 풍선처럼 부푼 줄 알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인제 보니 헬멧 아래로 바람이 비집고 들어와 머리통을 휘돌아 목덜미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폐 속을 가득 채운 바람의 부피가, 두 볼을 스치는 바람의 가벼움이, 하얗게 드러난 다리에서 파랗게 질린 엉덩이까지 인체의 곡선을 타고 흐르는 바람의 질감이 외부의 작용인지조차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아영은 바람과 하나가 된 환각에 빠져버렸다. 죽기 살기로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바람의 자유를.
다시 한번 모퉁이를 돌아 산기슭으로 접어들자, 조금은 좁아진 진입로가 시작되었다. 고개를 들 수도 없어 주변을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아영은 오토바이가 속도를 늦추는 것으로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감지했다. 진입로 끝, 입구에서 우측으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훤하게 불을 밝힌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찬혁은 건물 옆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헬멧을 벗고, 아영을 돌아보았다. 비비적대며 헬멧을 벗겨내려 애쓰는 아영을 대신해 헬멧을 훌렁 벗겨냈다. 그리고는 혼이 빠진 얼굴로 머리를 산발하고 앉아있는 그녀가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번쩍 들어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휘청 넘어지는 그녀를 붙들어 옆구리에 끼고 헝클어진 머리를 더 어지럽히는 장난을 치며 그가 웃어댔다.
"제법인데? 아직 살아있고. 바람 탄 소감이 어때. 이래도 또 바람이고 싶다 그딴 소리 할 거야?"
"일부러 폭주한 거지! 살살 달려도 됐잖아!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울상을 짓는 아영을 훅 끌어다 보듬어 안고 찬혁이 어르고 달래는 척 경고했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소릴 해서 죽다 살아나냐고. 바람처럼 사라진다는 소리 또 하기만 해. 벌이야. 알아들어?"
눈을 하얗게 흘기면서도 찬혁의 끌어당김에 맥없이 끌려가는 게 좋았다. 팩 밀치는 시늉을 해서 벌 같은 소리 한다고 반박 의사를 표했지만, 아영은 가슴에 새겨들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건물에서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아영은 재빨리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치고 찬혁의 뒤에 한발 뒤처졌다. 물러나는 아영을 훅 끌어다 곁에 세웠다. 여기가 네 자리라는 듯. 달려 나온 사람 중 한 명이 그의 손에서 헬멧을 받아 들자, 단체로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수고하십니다. 좀 어때요. 현지에서 체감하는 반응은 괜찮습니까?"
"매우 좋습니다. 특히나 각 동이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프라이버시 침해나 소음 피해에 관련된 그 어떤 불만 사항도 아직 한 건도 접수된 게 없었습니다."
"좋습니다. 오늘은 쉬러 왔으니, 이 정도로 하고. 준비됐죠."
"예. 1호동 VIP 캠프 준비되어 있습니다. 올라가시죠, 사장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들어가서 일 보세요. 알아서 갈 테니."
"아, 예. 편안한 밤 되십시오."
갑작스러운 찬혁의 등장에 바짝 긴장하고 기다리던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캠프장으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후, 불시 시찰의 공포에서 해방된 직원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각자의 근무지로 흩어졌다.
산등성이를 따라 이글루처럼 생긴 조형물들이 뜨문뜨문 하얗게 보였다. 그의 손에 이끌려 완만한 산행길을 오르며 아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야? 캠프장? 오기로 돼 있었어?"
"양평. 파라다이스 글램핑장. 개장한 지 얼마 안 됐어. 출발하기 전에 미리 연락했지."
"글램핑?"
"가볍게 떠나서 편안하게 즐기는 럭셔리 캠핑. 처음 들어봐?"
"못 들어봤어. 캠핑은 해볼 생각도 안 해봐서 관심도 없었으니까. 호텔, 리조트, 콘도. 이제 글램핑까지?"
"우리 아이들 놀이터."
"......"
우리. 아이들. 놀이터. 음절마다 찬혁의 손이 아영의 손을 꼭꼭 쥐었다 놓았다. 그녀의 호흡이 들숨에서 잠시 흡 멈췄다 내쉬어졌다. 폭주족답게 저 혼자 한참을 치고 나간 그의 청사진에 보조를 못 맞추고 그녀의 머리가 주춤댔다. 십 년 동안 도망치면서도 한결같이 꿈꿔온 순간이 바로 지금인데, 돈다발에 머리통을 후려 맞던 악몽은 왜 갑자기 동시다발적으로 전두엽과 심장을 짓누르는지. 표정을 지어내기 애매해져 버렸다. 바닥으로 추락한 제 초라한 위신을 추슬러 세울 겨를도 없이 찬혁이라는 급물살에 실려 떠내려가고 있다. 자괴감에 침몰해 익사하지 않으려면 제힘으로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였다. 전시회도 빚도 그리고 부모의 업도. 그 업보는 대체 어떻게 청산할 수 있는지 알 수도 없지만. 애써봐야 했다. 아영이 찬혁의 손을 살짝 당겨 이글루 같은 숙소로 들어가는 발길을 붙들어 세웠다.
"... 어제. 리나 갤러리에서 네가 본 거 사실이 아니야. 돈 요구한 적 없어. 우리 아빠의 전적에 빗대어 지레 넘겨짚은 것 같아. 난 단지 어떻게 리나가 우리 아빠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서 갔을 뿐이야. 너보다 내가 먼저 알고 싶었어. 너에게 그동안 말 못 했던 것도 리나의 폭로가 두려웠기 때문이었어. 네가 더 큰 상처를 받을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어..."
"......"
찬혁이 주머니에 손을 푹 찌르고 아영을 삐딱하게 내려다보았다. 1호동 캠프에서 흘러나온 불빛에 데크가 훤하게 밝았다. 마주 보고 선 채로 아영은 그의 삐딱한 무표정에 압도되고 있었다. 속을 가늠할 수 없는 얼굴로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주머니에서 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쓸어 넘기는 손짓에도 머리칼 아래 드러난 주름진 이마에도 피로감이 역력했다. 찬혁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뱉었다. 기가 막힌다는 듯.
"너무 화가 나서 돌겠다 지금."
"...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말 이게 다야. 어떻게 하면 네 화가 풀릴까. 알려줘..."
아영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반들거렸다. 내리깐 눈에 동그랗게 맺히는 눈물을 손끝으로 밀어내고 찬혁이 그녀의 볼을 양손으로 감싸 올려 눈을 맞췄다.
"네가 왜. 뭘 잘못했다고 미안해."
"......"
"내가 화나는 건. 그동안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거야. 그래서 너를 돌보지 못했다는 거. 너를 너무 외롭게 했다는 거. 힘들게 했다는 거. 그거라고."
"......"
"미안해할 사람은 나다."
결국, 흐흐흡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아영을 품에 보듬어 안고, 그는 그녀의 등을 쓸어 내렸다. 한참을 그렇게 부둥켜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쉼 없이 속삭였다.
"미안해."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아영의 등이 잦아들 즈음 찬혁이 그녀를 들쳐 안았다. 갑자기 번쩍 들려 화들짝 놀란 아영이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녀를 안고 그는 돔 막 안으로 들어갔다. 스튜디오를 연상시키는 아늑한 내부 공간은 침대부터 소파 그리고 식탁까지 모든 설비가 캠핑 장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모던하고 고급스럽게 갖춰져 있었다. 찬혁은 침대 위에 아영을 내려놓고 주방 앞 아일랜드 카운터에 준비된 와인 바로 갔다.
"한잔하자. 여기 치즈랑 몇 가지 준비돼 있는데. 배고프지. 뭐 줄까. 보자. 비스킷. 포도. 치즈. 비스킷 위에 골고루 얹어 줄까?"
"아니. 와인만 한잔할게. 입안이 껄끄러워."
찬혁은 와인 두 잔을 들고 와 아영에게 한잔 건네고 옆에 걸터앉았다. 와인 잔이 부딪쳐 영롱한 소리를 냈다. 갈증이 났는지 그는 단숨에 쭉 비우고 손등으로 입술을 쓱 닦아냈다. 바람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일까, 뒤끝을 울음으로 마무리한 때문일까. 아영도 목구멍이 파삭하리만큼 건조했다. 와인을 물 마시듯 꿀꺽 이는데 입가로 칠칠맞게 주르륵 흘렀다. 손보다 빠른 그의 혀가 와인을 핥으며 올라와 아영의 입술을 물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와인이 그의 입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쌉싸름한 와인의 뒷맛을 혀로 나누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둥켜안고 풀썩 넘어졌다. 입술을 물고 부풀리던 찬혁의 입술이 아영의 턱으로 목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처음보다 완곡하고 느려졌으나, 그의 애무는 밀도를 더해갔다. 원피스 지퍼를 내리고 어깨에서 밀어내자 어깨가 하얗게 드러났다. 가녀린 어깨를 혀로 둥글리다 잇몸을 저리는 쾌감을 참지 못하고 이를 박아 넣었다.
"아!"
목구멍으로 꾹꾹 집어삼키던 신음이 끝내 아영의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찬혁이 고개를 들고 내려다보았다. 더운 숨을 할딱이는 그녀는 달게 물오른 복숭아처럼 온통 발그레했다. 이를 박아 넣는 곳마다 달디 단 과즙이 스밀 것만 같았다. 야금야금 돌려 물 준비를 하는데, 아영이 상황에 전혀 걸맞지 않은 소릴 한다.
"곧 아침이야. 너 조금이라도 눈 좀 붙여야지. 무리하지 말고..."
찬혁이 픽 야릇하게 웃었다.
"재워줘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