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먼저 손 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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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은 내리다 만 청바지를 끌어 올리고, 젖은 수건으로 물감을 벅벅 문질러 닦으며 욕조에서 부리나케 나갔다. 다시 한번 제 꼴을 내려다 보자 한숨이 파하 터졌다. 씻기는커녕, 옷을 갈아 입을 겨를도 없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문을 살 열어 정수리부터 빼꼼이 내밀었다. 민 대표는 그림에서 대여섯 발자국 뒤로 물러나 벽에 붙은 그림 감상에 여념이 없었다. 머쓱하기도 하고, 몰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아영이 조용히 쭈뼛쭈뼛 곁으로 다가섰다. "오셨어요, 대표님…." "음. 아영 씨. 갑자기 불쑥 와서 미안했는데, 와. 오길 잘했다 싶은데! 이거 아주 놀라운데요! 저기 오른쪽 위 펜 작업의 디테일은, 아, 아영 씨. 모습이 왜 이래요?" 그림에 몰두하며 아영의 인사를 받던 민 대표가 곁에 선 아영을 돌아본 순간 흠칫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상체를 뒤로 물렀다. 태생적으로 흐트러지고 정갈하지 못한 것을 보기 힘들어하는 그였지만, 투명하리만치 흰 살결에 마구잡이로 덧칠된 보라색은 관능을 넘어 퇴폐를 연상시키는 묘한 심상을 불러일으켰다. "봐야 할 작품이 여기 있었네. 뭘 했길래 물감 범벅이에요? 새로운 프로젝튼가?" "아…. 물감 테스트 좀 하느라. 지금 꼴이 엉망이네요. 시간 내셔서 일부러 방문해주셨는데, 오늘은 날을 잘못 잡으신 것 같아요. 미리 연락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모습이라 죄송합니다." 빤히 응시하는 민 대표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민망해, 시선 둘 곳도, 몸 둘 바도 모르고, 아영은 그만 돌아가 주길 우회적으로 넌지시 비쳤다. 그러나 민 대표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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