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미성년자이기는 하지만 본인과 관련된 일이니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해하기 쉽게 직설적으로 표현해줄게요"
"네"
“돌아오는 토요일까지 사채를 전부 갚지 못하면 사채업자들은 돈 대신 은초희학생과 언니인 은초선을 부모가 동의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원할 때 언제든지 데리고 갈 수 있다는 계약서에 아버님은 도장을 찍었어요”
“데리고 간가는 건..”
“영화 같은 데서 본 적 있을 거에요.
언제, 어디에서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잡혀가면 여자도 멀쩡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아빠가 사채를 썼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엄청난 이자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머리가 아팠던 초희였다. 그런데 아빠가 도장을 찍었다는 계약서 내용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내용이라는 말에 하늘이 핑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민망했지만 눈 앞에 있는 사람의 도움이 없다면 저는 물론이고 언니까지도 인생이 끝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몸이 떨려왔기에 두 손을 맞잡으며 깍지를 꼈다.
“아버님이 나와의 거래조건에 대해서도 얘기를 했나요?”
“두 가지 조건을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맞나요?”
“맞아요. 그런데 아버님과 얘기한 후 계약서를 다시 확인하던 중에 상황이 복잡하고 어려워져서 한가지 조건을 더 추가하려고 오늘 아버님한테 다시 만나자고 했어요"
"방금 말씀하신 내용을 추가로 확인하신 건가요?"
"그래요. 아버님이 둘째 따님이 똑똑하고 야무져서 결정을 맡기고 싶다고 하셨어요. 마침 추가되는 조건이 둘째 따님이 결정해야 하는 사항이라 직접 만나겠다고 한거에요”
벼랑 끝에 선 저와 언니를 위해 그리고 가족의 안전을 위해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기에 초희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추가되는 조건을 이야기해 달라고 말했다.
“추가되는 조건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추가되는 세 번째 조건은 은초희 학생이 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오는 거에요”
“제가 집으로 들어 간다는 건 같이 살아야 된다는 뜻 인가요?”
“계약서에 대해 말한 건 당사자가 알아야 하는 내용의 아주 일부분이에요.
자세히 설명해줄 수 없지만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은초희 학생이 내 보호 아래 있지 않는다면 언니까지도 수일 내에 강령에서 사라지게 될 거에요. 사라지면 어떻게 된다는 건 앞에서 설명했으니까 생략할게요”
“사채를 갚으면 끝나는 일이 아닌가요?”
“끝나지 않을 거에요. 왜냐하면 그쪽에서는 아버님한테 돈을 빌려줄 때 은초희 학생과 언니를 타깃으로 정했거든요.
그러니 납치를 해서라도 자신들 계획을 성공시키려고 할 거에요”
“아.. 그러면 얼마 동안 한집에서 지내야 되는 건가요?”
“은초희 학생을 내 집에 들이는 이유는 두 가지에요. 하나는 모두가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사채 빚이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보다 더 많아서 부모님이 갚을 때까지 은초희 학생을 담보로 데리고 있으려고 하는 거니까 우리가 같이 살아야 할 시간이 꽤 길 거에요”
“죄송하지만 사채 빚이 정확히 얼마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채업자들이 아버님한테 이억 삼천이라고 말했다고 했는데 내가 확인한 바로는 그건 이자를 일부만 계산한 거더라고요. 아버님이 돈을 들고 갔어도 절대 갚지 못하도록 일부러 이자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것 같아요”
갚아야 할 빛의 일부가 이억 삼천이라는 말에 꼬마아가씨가 눈을 꾸욱 감았다 뜨자 우빈은 정확한 빚을 이제야 알았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 말없이 지켜만 보았다.
“지금 여기서 결정을 해야 되는 거죠?”
“시간을 더 줄 수는 있지만 사채를 갚아야 하는 날이 정해져 있으니 여기서 결정하는 게 좋기는 하죠”
“잠시 생각해도 될까요?”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으니 천천히 생각해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고”
“제가 결정을 하면 가족들은 안전한 거죠?”
“이런 순간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되요. 가족이 아무리 중요해도 자기 자신보다 소중하지 않아요.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면 추가된 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아버지랑 했던 약속도 자동으로 파기되니 은철씨 가족을 지켜 줄 이유도 사라져요”
우빈은 초희가 혼자 생각할 수 있도록 자리에서 일어나 순길과 함께 창가에 있는 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초희는 바에서 커피를 내리며 명함 속에 적혀있는 최순길이라는 남자와 이야기하는 성원재 후계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가족이 평안하게 살았던 예전으로 돌아 갈수 있다면 어떤 어려운 일도 할 수 있다며 잠자리에 들 때마다 기도를 하곤 했는데 하늘이 이런 답을 자신의 기도에 대한 답을 보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성원재 후계자가 말한 세가지 조건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가족들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금과도 같은 행운이자 금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제게 선택할 기회를 준 성원재 후계자도 장난으로 이런 제안을 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에 제가 승낙만 한다면 아빠와의 약속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확실하게 지켜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다시는 없을 행운이라는 걸 잘 알지만 낯선 집에서 낯선 사람들과 살아야 한다는 건 엄마가 필요한 여학생이 결심해야 하는 선택치고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결정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답을 가지고 고민 아닌 고민을 하던 초희는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불렀다.
"저기요.."
커피를 마시던 우빈과 순길은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우빈은 학생이 제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아니요, 마음의 결정을 내렸어요"
결정을 내렸다는 말에 우빈은 커피잔을 순길에게 건네고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 어떤 결정을 했는지 들어 볼까요!"
"말씀하신 세 가지 조건에 모두 동의 할게요. 가족들도 위험하지 않게 잘 살펴주세요"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거래 조건에 동의를 했으니 내일 사채업자를 찾아가 빚을 청산하고 연락하도록 할게요.
빚을 청산하더라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아버님이랑 꼬마아가씨는 절대 밖으로 나오면 안돼요. 그러니 아르바이트도 끝내야 해요"
“아르바이트는 정해진 일정이 있어서 마음대로 끝낼 수가 없는데요”
“그건 내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까 걱정 할 거 없어요.
나하고 꼬마아가씨랑 성격이 잘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한 집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큰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일이 마무리 되는 건 얼마나 걸릴까요?"
"큰 일은 하루 정도면 정리가 될 거에요.
늦어도 모레까지는 연락할 테니까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네"
"저기 있는 직원이 학생이 집에 있는 동안 연락할 사람이에요. 혹시라도 생활하는데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로 부탁하고 저 사람이 연락하면 대문을 열어도 괜찮아요"
자신을 계속 꼬마아가씨라고 부르는 성원재 후계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초희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바닥으로 내렸다.
이야기를 끝낸 꼬마아가씨를 데리고 순길이 객실을 나서자 우빈은 바 테이블로 돌아가 차게 식은 커피를 버리고 따뜻한 커피를 다시 내리면서 수석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은초희 학생 아르바이트를 오늘로 마무리 하도록 했다.
브이아이피를 만나고 일터로 복귀하던 초희는 저를 배웅해주는 순길이 지켜 보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라 일러주자 며칠 전부터 누군가 저를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 생각나 머리를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프런트 뒤쪽 휴게 공간에서 학생에게 퇴근해 집에 갈 때까지 함께 할 직원 얼굴과 연락처를 알려준 후 순길은 객실로 다시 올라갔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퇴근하던 초희는 순길이 조언 한데로 중간에 편의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집으로 들어 갔다.
집에서 찬이랑 시간을 보내고 있던 아빠는 초희가 들어오자 그 사람과 만남이 어땠는지 물었다.
“아빠 말이 사실이었어. 내일 사채 정리해준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말하기를 사채를 정리하러 가면 아빠한테 안좋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자기가 연락할 때까지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어”
“안 좋은 일?”
“응. 그러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아빠도 연락 올 때까지 밖에 나가지 말아야 해”
“내가 회사를 갈 것도 아니고 그럴게”
“편의점도 나가면 안되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
“알았어. 우리 딸 아빠대신 고생했어”
초희에게 일이 해결 될 거라는 말을 전해 들은 은철은 세상 가벼워진 마음으로 찬이가 놀고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빠와 찬이랑 먼저 저녁식사를 마친 초희는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며 거실에서 공부를 하다 늦은 저녁이 돼서야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 식사를 챙기기 위해 보던 책을 접고 주방으로 향했다.
엄마가 식사를 하는 동안 초희는 맞은편에 앉아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물론 엄마가 듣고 아빠를 질타할 만한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자신들을 도와주는 사람은 가명으로 말했다.
사채업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난장을 피우기 전에 돈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에 엄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둘째 딸이 빚을 대신 갚아준 사람 집에서 엄마랑 아빠가 일정금액을 갚을 때까지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에 걱정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엄마는 문 하나 건너에서 아빠랑 티브이를 보고 있는 찬이가 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물었다.
“돈 빌려준 사람 나이가 많아?”
“아니, 엄청 젊어”
“젊은 나이에 성공도 하고 돈도 많은 사람을 네 아빠는 어떻게 알았어?”
엄마의 질문에 초희는 잠시 머뭇거리다 답을 했다.
“그것까지는 못 물어 봤어”
PA 후계자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될 수 있는 한 그의 신분은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견물생심이라고 저희를 도와 준 사람이 강령 최고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 몰랐기에 가족들이 알게 되더라도 최대한 늦게 아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한 초희였다.
“만나서 얘기해 보니까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어”
“우리 딸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괜찮은 사람인가 보네”
“연락도 자주 하고 주말에는 엄마랑 찬이 보러 올 테니까 내 걱정은 하지마”
“아빠는 꼭 멀리 가서 일을 해야 한데?”
“그게 나을 수도 있어 엄마.
여기 있으면 도박했던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거나 연락해 올 테니 또 손댈지 모르잖아”
“그렇긴 한데.. 네 아빠 혼자 보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아빠 회사 다니는 동안에는 성실하게 다녔잖아. 갚아야 할 빚이 많으니까 열심히 일 할거야”
“그래야지, 거기 가서도 사고 치면 그때는 진짜 이혼이야”
이혼하겠다는 엄마 말에 차우빈 얼굴이 떠오른 초희는 ‘엄마가 이혼하기 전에 어떤 사람한테 호되게 혼날지도 몰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머리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아침 일찍 송도와 충재를 동우라는 사람이 관리하는 사무실로 보내 사채를 정리하도록 한 우빈은 강령은행에 들러 은철이 갚지 못한 은행대출금도 정리했다.
“은철 고객이 대출 갚으러 오면 받아서 제 계좌로 넣어주시면 됩니다”
“누군데 네가 직접 대출금을 다 갚아 주는 거야?”
“저한테 행운을 가져다 줄 사람이요”
“행운?”
“네”
“차우빈도 행운이 필요한 일이 있어?”
“지금까지는 없었는데 앞으로는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하하하, 알았다. 부탁한대로 담당자한테 말해 놓을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말한 선물 내일 보내려고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저녁에 회장님 사무실에서 말씀 드릴게요”
“선물을 벌써 준비했어?”
“제가 시간 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요”
“어떤 선물인지 궁금하니 저녁에 회장님 사무실에서 보자”
“네, 저는 볼 일이 있어서 그만 가볼게요”
은행에서 성원재 위에 만들어 놓은 벙커로 향한 우빈은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송도를 만났다.
“사채는 잘 정리 됐어?”
“네, 사무실에 있던 놈들 면상도 다 따왔습니다”
“고생했어. 그쪽에서 별 말 없었어?”
“돈을 받으면서도 표정이 좋지 않더라고요. 새끼들 눈치를 보니까 밤에 집으로 쳐들어 갈 듯해 보였습니다”
“선금을 받았다면 대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갈지도 모르지”
벙커로 들어간 우빈은 순길에게 꼬마아가씨 집에 직원들을 더 붙이라고 지시하고는 자신이 준비한 선물이 잘 준비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아침에 사채를 정리하러 간다는 문자를 받았던 은철은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정리가 됐다는 연락을 받고는 무척이나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은철에게 문자를 보내는 순길은 은초희 학생에게 문자를 보내서 대문 밖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제 연락이 없으면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고 다시 한번 당부했다.
*****
퇴근 시간이 지나고 제 사무실을 찾아온 최두식전무와 아들을 보면서 차희태회장은 무슨 일인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 퇴근도 못하게 해 놓고 왜 둘 다 말이 없어?”
“저도 우빈이 초대 받고 온 거라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우빈이 세 사람을 한 곳에 모았다는 말에 차 회장은 제 아들을 바라 보았다.
“무슨 일로 늙은이 둘을 불러 앉혔어?”
“이 사무실에 늙은이는 회장님 밖에 없는데 왜 전무님까지 끌어들이세요"
"고맙다. 나는 제외해 줘서"
최두식 말에 우빈이 웃으며 두 어른을 사무실에 눌러 앉힌 이유를 꺼냈다.
"두 분 다 강령에 불법 사채업자가 있다는 얘기 들어 보셨어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을 하는 우빈에게 차희태회장과 최두식의 시선이 쏠렸다. 두 어르신들 중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최두식전무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빈아?”
“전무님 은행 직원들한테 그런 얘기 들어 본적 없어요?”
“흠.. 몇 달 전부터 사채를 갚아야 한다면 대출 가능한지 물어오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얘기는 임원들한테 들었어.
네가 하려는 말과 관계가 있는 거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