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희태회장이 최두식을 자신의 집으로 자주 불러 식사를 하며 아들에게 최두식을 자주 선보였기에 아버지가 특별히 총애하는 최두식을 아들도 가깝게 지낸다고 생각했고 그가 성인이 되어 후계자가 되었을 때 가장 큰 도움이 될 사람이라 곁에 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던 도련님은 천상계 존재였기에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똑똑한들 일개 직원에게 도련님이 잘 보일 이유는 전혀 없었다.
우빈과 최두식에 대한 소문은 2대에 걸쳐 총애를 받는 그를 폄하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에 의해 생긴 뒷말 이었을 뿐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가까이 지냈기에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지만 우빈은 제 기준에 들지 않는 사람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최두식과 허물없이 지내는 이유는 자신의 기준에 그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룹뿐만 아니라 블랙내부에서도 최두식을 편애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차희태가 최두식을 가까이 두는 것은 누구와 달리 공과 사가 명확하고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탁월한 경영능력과 품위 있고 폭 넓은 인간관계를 대체할 만큼 뛰어난 후순위가 없다는 것이 가치가 높은 이유였다.
▷▷▷
“상담미팅은 더 이상 없는 거지”
“응, 완전 끝났어! 다들 고생했다”
“말을 하도 많이 했더니 입에서 단내가 난다”
“그러게 왜 그렇게 미사여구를 자꾸 붙여. 너랑 상담하는 사람도 힘들 거야 말이 너무 많아서”
“우빈이는 졸업하면 강령으로 바로 내려와야 되는 거지?”
“안 그래도 그 문제로 너희들한테 할 말이 있어”
“진지한 걸 보니 좋은 일은 아닌가 보다”
“왜, 무슨 일 있어?”
“성원재를 더는 비워 둘 수가 없어서 4학년 수업은 성원재에서 왔다갔다하면서 받을 생각이야.
주식투자 일은 너희들끼리만 해야 되니까 싸우지들 말고 잘 해봐”
“어~ 아예 손을 뗀다는 뜻이야?”
“네가 완전히 손을 떼면 타격이 너무 큰데”
“그럴 생각이 없으면 오늘 투자상담도 하지 말지 그랬어”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어젯밤에 갑자기 결정했어.
투자상담은 일정까지 잡았는데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건 비즈니스 매너가 아니어서 그냥 진행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진행했다”
“회사에 문제가 있는 거야 아니면 어머니한테 문제가 생긴 거야?”
“음.. 두 가지가 섞인 복합적인 일이야”
“회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어머니까지 엮인 문제면 우리가 양보해야지”
“주식 동아리야 우리 넷이 머리 맞대면 손해는 안보겠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네가 공을 많이 들였는데 아깝지 않겠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벌여졌을 땐 그에 맞는 선택을 하는 거지”
“네가 넣어둔 자본금은 그대로 둘 거야?”
“응, 너희들이 주식동아리를 하는 동안에는 그대로 둘 테니까 내년에도 많이 불려 줘”
“올해처럼 좋은 수익율이 나올지는 모르겠다”
“오늘 상담도 너희들이 다 했는데 결과도 좋았잖아. 본인들 능력을 믿어”
“덕담하는 거야!”
“강령에서 지내기는 하지만 온라인으로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으니 문제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나도 그렇지만 너희들도 일년만 다니면 졸업이니 결국에는 내년 주식장 마감하면 동아리도 끝내야 하는 데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되지 않아?”
“지금은 학생이라고 아버지가 그냥 뒀는데 졸업하면 자유도 끝이다”
“우빈이는 면제 받았으니 상관없지만 군대는 어떻게들 할 거야?”
“나야 고시패스하고 보드 받으면 가야지”
“나는 졸업하고 군대 갔다가 아버지 밑으로 들어갈 거야. 현역 아니라 신청기간이 정해져 있어”
“그러면 졸업하면 한 일년은 다 같이 얼굴 보기 힘들겠네”
“이럴 때는 면제자가 부럽다”
“상담도 잘 끝났겠다 저녁 먹으면서 한잔하는 거 어때? 내가 살게”
“강령으로 불렀으니 네가 사는 건 당연하지”
“그것도 그렇고 네가 올해 돈 제일 많이 벌었으니 거하게 한잔 사”
“그래! 그래! 좋은 곳으로 안내해~”
밤새도록 자신의 핸드폰으로 왔던 수없이 많은 메시지들 중에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을 선별해 친구들과 상의 후 투자상담을 잡았던 우빈은 급하게 잡힌 일정에도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강령까지 내려와 준 친구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기로 하고 회의실을 정리했다.
최두식전무가 내어준 강령저축은행 본점에 있는 회의실을 말끔하게 치운 우빈과 친구들이 일층으로 내려왔을 때 영업점 업무시간이 끝났기에 은행을 찾아오는 고객들은 보이지 않고 일 마감을 하느라 직원들 얼굴을 책상으로 내리 꽂혀있었다.
오랜만에 본점영업장에 발을 들인 우빈은 영업장을 빙 둘러본 후 뒷문으로 나가려다 개인대출 상담창구에서 고객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직원을 발견하고는 친구들에게 먼저 예약한 장소에 가 있으라고 말한 후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상담창구로 걸어갔다.
“무슨 일 입니까?”
고객과 한 시간이 넘게 실랑이를 벌이느라 짜증이 나있던 직원은 무슨 일인지 물어오는 질문에 감정이 격해져 직접 해결해 줄 거 아니면 본인 업무나 마무리하고 퇴근하라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좋은 마음으로 물었는데 짜증 섞인 답이 돌아왔지만 우빈은 화를 내는 대신 다시 질문했다.
상관하지 말고 본인 일이나 하라는 말에도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하며 제 인내심을 건드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던 직원은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고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무슨 일인지 설명했다.
“대출이 불가능해서 안되는 이유를 여러 번 설명해드렸는데도 무조건 대출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저렇게 앉아서 버티고 계십니다”
“개인대출상담 팀장은 퇴근 했나요?”
“아니요, 안에서 일 마감하고 있습니다”
“어디 계세요?”
우빈이 어디인지 앞장서라고 하자 직원은 앞장서서 걸으며 팀장이 있는 안쪽 사무실로 브이아이피를 안내했다.
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기에 아무런 직함도 없는 차우빈이지만 PA그룹 계열사직원들과 강령에 사는 사람이라면 차우빈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그가 어떤 계열사에서도 무슨 일을 하든 제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대출상담 팀장 따위는 그를 우러러 봐야 하는 입장이기에 그가 서류를 열람하는 것도 사무실에 들어오는 것도 제지 할 수 없었다.
“영업시간이 끝났는데도 고객이 왜 영업점에 남아 있습니까!”
“그게.. 고객을 강제로 끌어내면 민원이 생길 수 있어서 최대한 설득해서 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상황을 보니 설득이 안될 거 같은데요. 설득이 안돼서 고객이 영업점을 나가지 않으면 담당 직원도 여기서 밤을 새야 하는 겁니까?”
예비회장님 질문에 개인대출팀장은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은 채 무슨 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본점이라 보는 눈이 많아 설득해서 내보내기로 결정을 하셨다면 힘없는 직원이 아니라 팀장이 고객을 직접 설득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아.. 네”
간단한 질문에도 제대로 답을 하지는 못하는 팀장을 지켜보고 있던 우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앞으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설명했다.
“영업시간이 끝나면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고객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내세요”
“알겠습니다”
“오늘 일은 개인대출팀장님 판단 미스이자 팀장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래 직원에게 떠넘긴 것으로 저는 판단하는데 최두식전무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예?”
사무실에서 팀장과 이야기를 끝낸 우빈은 상담창구로 돌아가 아직도 자리에 앉아서 망부석이 되기로 결정한 고객과 눈을 맞추기 위해 직원의자에 앉으며 고객을 불렀다.
“고객님”
“.. 예”
“제 말이 끝나고 일분 안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은행 밖으로 나가지 않으시면 경찰을 불러서 영업방해죄로 인계할 겁니다. 지금 상태로 경찰서에 잡혀가지 않으시려면 저기 있는 직원을 따라 가서 밖으로 나가서 집으로 가세요”
“저.. 대출은 정말 안 되는 겁니까?”
“제가 서류를 살펴봤는데 저희 은행에서 대출은 불가능합니다”
나이는 어려 보이지만 팀장이라는 사람도 어려워 할 정도로 높은 자리에 있는 듯한 사람이 대출이 불가능하다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침울한 표정된 고객은 체념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차갑다 못해 냉기가 흐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시선이 맞춰지자 자신도 모르게 눈을 피한 고객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객 뒤에 서 있던 직원은 자신도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고객에게 자신을 따라 오라고 한 후 뒷문으로 가 문을 열었다. 미련이 남는지 자신이 앉아 있었던 자리를 한번 돌아 본 고객은 열려 있는 작은 문으로 나갔다.
*****
“방금 나간 고객이 은철님 맞나요?"
“네, 맞습니다”
고객을 밖으로 내보내고 자리로 돌아 온 직원에게 우빈은 고객 서류가 맞는지 물었고 직원은 우빈의 손에 들려 있는 서류를 보고는 방금 나간 고객의 서류가 맞다고 답했다.
“이 서류 확인해 볼게 있어서 제가 가지고 갔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아, 원본은 드릴 수 없고 복사해 드릴 테니까 잠시 기다려 주세요"
옆에 서있던 팀장이 말하자 직원은 우빈에게서 서류를 받아 복사기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럴 가능성이 낮기는 하지만 내일 은행에 오거든 시간에 상관없이 직원들 번거롭지 않게 경찰에 연락해서 바로 내보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우빈이 팀장에게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직원이 복사된 서류가 담긴 봉투를 건넸다.
강령은행은 2금융권에 속하는 저축은행으로 1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높은 이자에도 불구하고 돈을 빌리려 오는 곳이기에 은행직원들이 다루기 쉽지 않은 고객들도 종종 있는 곳이었다.
직원이 준 서류봉투를 들고 뒷문으로 나온 우빈은 은행에서 쫓겨 난 고객이 집에 가지 않고 건물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서류에 적혀있던 고객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은철씨!”
대출을 받지 못해 집으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돈을 빌릴 친구도 없어 은행 앞에 쭈그려 있던 남자는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방금 전 은행에서 자신을 쫓아낸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다시 바닥으로 떨구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얼굴로 저를 보던 남자가 머리를 다시 바닥으로 처 박는 것을 본 우빈은 밤새도록 저러고 있을 남자가 마음에 쓰여 그의 앞으로 다가가 자신도 몸을 낮춰 쭈그리고 앉으며 대출이 왜 불가능한지 다시 설명했다.
“집은 월세라 담보 설정이 안됩니다. 그리고 가족명의로 신용대출도 받을 수 있는 만큼 다 받아서 저희 은행에서는 더 이상 대출이 안됩니다. 밤새도록 여기에서 이렇게 있어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니까 쓸데없이 힘을 빼지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여기 계속 이러고 있으면 은행에서 신고 안해도 경찰이 와서 데리고 갑니다”
우빈이 상황을 설명하자 고객은 자신도 은행에 빚이 많다는 건 알지만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 있어서 돈이 꼭 필요하다며 신체포기각서라도 쓸 수 있으니 대출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고객님 말에 우빈은 은행에서는 불법적인 서류로 대출을 해줄 수 없다며 돈이 꼭 필요한 상황이라면 신체포기각서를 받아주는 사채업자를 찾아가면 원하는 만큼 빌릴 수 있다고 말했다.
“저도 그런 곳에서 돈을 빌리면 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거기에서만큼은 빌릴 수 없습니다”
“은철 고객님 서류를 전부 확인해보니 지금까지 빌린 대출금도 상당해서 고액연봉을 받는 직장에 다니는 게 아니라면 평생에 걸쳐서도 돈 갚을 금액이던데 그건 다 뭐하셨어요?”
“그게.. 투자를 했는데 잘 안돼서..”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 판별 능력이 탁월한 사람인데 거짓말을 하고 계시네요!”
상황을 모면하려는 답이 아니라 진실을 듣기 위해 답을 기다리던 우빈은 고객이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가던 길을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발걸음을 떼고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우빈의 바지 끝을 잡으며 은철이 그를 잡았다.
근처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순길이 모습을 드러내어 가까이 다가오자 우빈은 손을 들어 제게 오는 것을 제지했다.
“제가 그럴 자격이 안된다는 건 잘 알지만 여기 말고는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서 그럽니다”
“은행에서 빌려 준다고 해도 이자에 원금까지 매월 갚을 금액이 몇 백은 될 텐데 능력은 되세요?
지금까지 빌린 돈도 제때 못 갚아서 연체가 반복이던데 대출이 더 늘어나면 어떻게 갚으실 생각이세요!”
제 바지 끝을 잡고 있는 손을 풀어낸 우빈은 은철을 바닥에서 일으켰다.
“이번에 대출 받으면 어디에 쓰시려고요?”
“…”
“대출을 받으면 어디에 쓸 건지 정도는 알아야 허락을 할지 말지를 저도 결정을 하지 않겠어요”
“당장 갚아야 하는 사채 빚을 갚으려고 그럽니다.
그쪽에서 얘기하기를 이번 주까지 갚지 않으면 저를 대신해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빌린 돈을 갚도록 해야 한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러니 저 말고 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제가 대출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강령은행 말고는 기댈 곳이 없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는 이유가 사채 빚을 갚기 위해서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눈 앞에 남자는 조만간 자살을 선택 할 정도로 한없이 나약해 보였다. 인생 막장에 와 있는 남자를 보며 우빈은 가장으로서의 무능함으로 점철된 어리석은 사람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대충 어떤 일인지 알겠습니다.
지금은 제 직원한테 연락처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가서 제가 연락할 때까지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세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강령은행 앞에 나타나면 경찰한테 바로 잡혀가니 올 생각은 하지 마세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순길을 부른 우빈은 몇 가지 지시를 내린 후 먼저 친구들이 기다리고 식당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