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이별

5000 Words
차희태가 만든 성과 같은 큰 집을 별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산 위에 지어진 성이라는 뜻으로 강령사람들은 그곳을 성원재라 불렀지만 사춘기였던 우빈에게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 쌓인 성원재는 족쇄이자 감옥과 같았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대학을 선택하고 강령을 떠났는데 좋지 않은 일이 생겼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별채를 나온 우빈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순길과 함께 쥐새끼들이 잡혀 있는 벙커로 향했다. 그가 가는 벙커는 직접 만든 비밀장소로 성원재에서 할 수 없는 일을 처리하기 위해 만든 곳이었다. ▷▷▷ “전무님” 전무실 문이 열리고 반가운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며 들어오자 책상에 앉아있던 최두식은 고개를 들어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는 젊은 남자를 반갑게 맞았다. “강령에 왔다는 소식은 회장님한테 들어서 불러야지 하면서도 일이 많아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먼저 찾아왔네” “저도 인사만 하러 온 건 아니고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무슨 부탁이길래 직접 왔어?” “회의실 하나를 빌려 주셨으면 해서요. 호텔보다 여기가 편해서 왔어요” “회의실이야 얼마든지 빌려 줄 수 있지! 어제 내려왔다면서 쉬지 않고 일하려고 사무실 빌리는 거야?” “예정에 없단 개인투자 상담이 잡혀서요” “개인투자는 받지 않는 걸고 아는데 어쩐 일로 상담을 하기로 결정했어?” “크든 작든 사람들 하고는 돈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아주 살짝만 받기로 했어요” “수익율이 낮아도 이익이 난다면 싫은 소리하는 사람은 없을거야. 그리고 네 실력이라면 투자자들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줄 테니” “제 능력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기 투자자로서 객관적인 평가일 뿐이야” “투자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운이 따라야 하는 일이더나구요” “네가 운이 좋은 게지” “투자 안목은 회장님 보다 네가 더 좋은 것 같다” “나이든 아버지보다 젊은 제가 낫지 않을까요!” “회장님이 들으면 섭섭하다 하시겠지만 안목도 그렇고 재물복도 초대회장님까지 포함한 삼대 중 네가 가장 우위에 있어” “하하, 할아버지보다 높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제 회장님 만나서 한바탕 했다면서” “벌써 알고 계시네요” “집에 있는데 나오라고 전화를 하셔서 회장님이 묶고 있는 호텔로 갔지” “전무님도 회장님이 나오라고 하면 두 말 못하고 나가야 하나 봐요?” “나이는 들었어도 월급 받으니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지. 맞선 보라고 했다가 욕만 들었다고 하시면서 웃으시던데” “사실대로 말하기 창피하셨나 봐요, 순화해서 말씀하신 걸 보니” “만나는 사람 없으니 너희들 식으로 소개팅한다 생각하고 가볍게 만나보지 왜 싫다고만 해!” “순수한 마음이었다면 모르는 척 나갔을지도 모르지만 회장님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자리를 만드는지 전무님도 잘 아시잖아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손주의 손주들이 죽을 때까지도 다 쓰지도 못할 만큼 벌었는데 마음에 들지도 않는 여자랑 결혼해서 인생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요” “네 생각과 달리 여자가 괜찮을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정략으로 얽히는 관계자체가 싫어요” “결혼을 할 생각은 있는 거야?” “첫 눈에 꽂히는 여자가 생기면 보쌈을 해서라도 할 생각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세상에 보쌈도 혼전 임신도 혼자 좋아한다고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 잘 알지?”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냥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생긴다면 결혼할 마음이 있다는 뜻이에요” “허허, 차우빈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너무 늦지 않게 나타나야 할 텐데” “결혼이 늦어지더라도 그런 여자랑 할 생각이에요” “네가 아무리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회장님이 마음 먹고 밀어 붙이면 방법이 없다는 거 잘 알 테니 서른은 넘기지 말거라” 최두식전무 말대로 아버지가 제 눈치를 보는 듯 말하지만 스무살이 되었을 때부터 결혼을 시키려고 노력했기에 어느 순간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혼을 성사시키려고 할 것이라는 걸 우빈도 잘 알고 있었다. “저한테 결혼하라는 말을 하기 전에 전무님이 먼저 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내일모레 육십인데 이제와 무슨 결혼이야. 나는 이대로 자유롭게 살다 갈 생각이다” “전무님은 자유롭게 살다 가신다면서 저한테는 왜 결혼하라고 하시는 거에요” “나는 도련님이랑 다르게 물려받을 가업도 물려줄 가업도 없으니 결혼이 필수는 아니지” “그런 이유로 결혼을 해야 하는 거라면 결혼 없이 자식만 있어도 되지 않아요?” “결혼은 하지 않겠지만 자식은 만들겠다고 하면 회장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예상이 안되지만 이사장님은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 설득할 수 있겠어?” “회장님은 설득할 수 있는데 어머니는 불가능하겠네요. 지금도 방탕하게 즐긴다고 한 소리 하셨거든요. 아마 제가 피임을 잘못해서 아이가 생겼다고 하면 결혼하라고 하실 분이에요” “글쎄, 나무라기는 하시겠지만 결혼을 강요하시지는 않으실 게다” “그럴까요?” “결혼을 안한 사람이 조언하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사랑으로 결혼을 했든 필요에 의해 결혼을 했든 시작과 상관없이 결혼생활을 무탈하게 유지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더구나. 그러니 잘못을 혼내시기는 하겠지만 네가 그 여자를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혼을 강요하실 분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전무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전무님은 정말 독신으로 사실 거에요? 물려줄 가업은 없어도 재산은 상당할 텐데요”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은 조만간 기부할 생각이고 나머지 절반은 네가 결혼해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전무님 재산이니 어떻게 사용하시든 상관없지만 재산을 남겨줄 가족도 전혀 없으세요?” “가족들이 있기는 하지만 살면서 지원해줄 만큼 해줬기에 유산을 남겨 줄 생각은 없단다” “혹시 혼외 자녀도 없으세요?” 지금까지 사생활에 대해 물어본적 없던 우빈이 처음으로 제 사생활에 대해 물어오니 선뜻 답을 하지 못하던 최두식은 꽁꽁 숨겨두었던 과거를 풀어냈다. “삼십년도 더 전에 해외를 나간 적이 있는데 동양인이 흔하지 않은 시골로 갔다가 그곳에서 한 여자를 만났는데, 시골이다 보니 여행객이 묶을 수 있는 숙소는 한 곳 밖에 없어서 같은 숙소에서 지내게 되었단다. 같은 숙소에서 자주 만나다 보니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면서 한달이 지난 후에는 한방을 쓰게 되었단다. 그렇게 두달 동안 그 여자한테 푹 빠져 지냈어” 인물도 능력도 뛰어난 최두식전무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던 우빈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몇 달을 함께 지낼 만큼 마음에 들었던 여자와 왜 결혼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 당시 한방을 쓸 정도면 깊은 관계를 원했다는 뜻인데 결혼을 못한 이유가 있어요?” “한국으로 들어오는 날 해외공항에서 사라져 버렸단다” “아.. 이름이나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면 찾는 게 어렵지 않았을 텐데요” “그 여자는 나에 대해 알고 있었는데 아무런 메시지도 남기지 않았어” “그럼 공항에서 헤어진 이후 지금까지 연락이 한번도 없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오고 네다섯 달이 지나고 편지 한통이 왔는데 아이를 가졌다고 적혀 있었어” 세 달의 짧은 연애의 끝이 아이를 가졌다는 편지 한통이었다는 말에 우빈의 왼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이는 만나 보셨어요?” “그 후로 다시 연락이 없었으니 만나지 못했어. 멋진 여자였으니 아이도 잘 키웠을 거라 믿는다” “그 여자분이랑 아이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신 거세요?” “처음으로 몸과 마음을 준 여자이기에 잊혀지지가 않더구나” 강제이별을 당했기 때문인지 아련한 눈빛으로 창 밖을 보는 최두식을 우빈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다시 네 얘기로 돌아가서. 너는 PA를 지속시켜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태어났잖아” “꼭 혈연으로 세습될 필요는 없지 않아요!” “최대규모 조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잡음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이유는 블랙을 세운 뿌리가 수장을 강하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혈연과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을 수장에 앉히겠다고 하는 순간 블랙은 피 튀기는 참혹한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사라지게 될 게야” “혈연 세습이라는 것이 시대를 역행하는 느낌이에요” “많은 조직들이 자식을 통한 세습을 선택하는 건 엄청난 자본력을 가진 권력을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지 자신들 돈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야. 강력한 구심점이 없는 권력은 분열을 불러오고 그 분열은 가장 밑에 있는 사람들부터 피를 흘리도록 만든 후 권력을 지키지 못한 오너는 마지막에 피를 흘리며 가진 것을 전부 잃고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걸 잊지 말거라” “이 막강한 힘을 언제까지 지킬 수 있다고 보세요” “어떤 수장을 만나느냐에 따라 조직 운명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 거야.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우빈이 네가 너를 닮은 아이를 낳아 후계자로 올린다면 앞으로 백 년은 문제 없을 것 같다” “하하, 전무님 응원에 힘입어서 그런 아이를 같이 만들 수 있는 여자가 빨리 눈에 띄면 좋겠네요” “후계자가 될 날이 머지 않았기에 한마디만 더 해도 될까?” “전무님 애기는 들어야죠. 말씀하세요” “블랙에 눈에 차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 사람들이 회장님을 보필하고 있으니 네가 조직을 완전하게 장악할 때까지는 척을 지는 일을 하지 말거라. 가족으로 엮인 이상 반역이 아니라면 끝까지 책임지는 게 수장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걸 잊어선 안돼” 자신과 같은 의견은 아니지만 저를 아끼는 말이기에 반박하는 대신 머리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 한 우빈이었고 최두식도 더는 우려가 담긴 조언을 하지 않았다. 스물다섯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전투를 위해 태어난 전사처럼 강인한 힘과 탁월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젊은 후계자는 자신의 힘과 리더십을 고등학생 때부터 발휘하기 시작했다. 성별을 떠나 학생들은 그를 우상처럼 바라봤고 대학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한가지 더 말씀 드릴게 있어요” “무슨 일인데 갑자기 그리 진지해졌어!” “제가 서울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성원재가 손을 탔더라고요” “성원재에 그럴 말한 사람이 없을 텐데!” “저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안일해졌나 봐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상황이 됐어요” “누군지는 찾아냈고?” “어제 은밀히 찾아내서 벙커에 넣어 뒀어요” “밑에 둔 사람들 솜씨가 상당하구나” “순길이만 해도 일당 백이잖아요. 제가 인복도 좋은가 봐요” “허허, 그 말에는 노코멘트를 해야겠구나" "그나저나 성원재 내부 사람을 끌어들일 정도면 배후가 녹록한 사람은 아닌 듯싶구나” “그렇죠. 회장님 주변에서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은 정해져 있다는 것도 아시잖아요” 블랙대표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직을 아예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을 은근히 드러내면서 회장님 심기를 건드는 일도 서슴없이 하고 있는 전필용이 회장님도 우빈도 없는 성원재에 마수를 뻗쳤다는 것에 혀를 찼다. 제 앞에 있는 우빈을 잠시 바라보던 최두식은 지난 일을 확인하려는 듯 물었다. “중학생 때 있었던 일 배후가 그 사람이라 생각은 변함없이 확고한 거니?” “얼굴을 본 것이 아니니 반신반의하는 거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사람이 보지 못하게 되면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지면서 모든 것이 몸에 새겨진다는 말도 사실이에요. 제 앞에서 비웃던 놈에게서 났던 체취가 제 뇌에 새겨졌어요” “그렇구나. 지금 성원재에 손을 댔다면 노리는 것이 있다고 봐야겠구나” “아무래도 어머니 안위가 걱정돼서 제 사람들을 성원재로 들였어요” “네 사람들이라면?” 완성되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최두식전무와 눈을 맞춘 우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했고, 최두식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성원재에 손을 댔다면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일이니 회장님한테 바로 보고할 거니?” “제가 직접 처리할거에요. 어제 회장님 만나러 가는데 변종현실장이 전필용이 조만간 일을 벌일 것 같다고 말해서 선물을 줄 생각이에요” “선물?” “네! 어떤 선물을 줄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데 선물꾸러미가 만들어지면 알려드릴게요” “대충이라도 알려주면 안되겠니! 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 궁금하구나" "갑작스럽게 결정한 거라 확실하지 않아서요. 확실하게 결정된 게 아니면 어머니한테도 말하지 않는 게 제 원칙입니다” “허허, 그리 말하니 더 궁금하기는 하지만 네 원칙이라니 더 물어보지 않으마” “그리고 선물은 개봉 직전에 알려줘야 재미와 반전이 큰 법이니 기대감을 갖고 기다려 주세요" "혹시라도 무리해서 일을 진행하지는 말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거라” “전무님 도움이 필요하면 새벽에라도 연락할 테니 전화 꼭 받으세요" “그래. 성원재 일은 며칠 지나서 회장님께 내가 말씀 드리도록 하마” “네. 저는 다른 약속시간이 있어서 가볼게요” “그리하거라”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차우빈이 진짜 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어머니인 여진과 최두식전무가 전부였다. 아버지와는 십년 전 일 이후 둘 사이에 벽이 생겼고 그 후로는 아버지가 제 인생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했기에 변종현실장도 어렵게 생각했다. PA그룹과 조직을 통틀어 차우빈과 독대 하는 사람은 최두식이 전부일만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두 사람 인연은 우빈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였다. 그룹 확장을 위해 강령은행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차희태는 총책임자였던 최두식을 집으로 불러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회장님 집에 자주 불려가면서 집안 사람들은 도련님이 아프면 회장님 대신 그에게 연락이 했고 바쁜 회장님을 대신해 최두식은 도련님을 데리고 응급실로 달려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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